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는 명종 임금 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조선 불교를 전성시대로 끌어올린 역사적 인물이다. 유교 세력으로부터 '희대의 요승(妖僧)'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보우 스님은 50년 남짓한 삶의 흔적을 짧고 굵은 목소리의 <임종게(臨終偈)> 로 남겼다. 임종게(臨終偈)>
"허깨비가 허깨비 고을에 들어/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동국대학교 역경원 ;<한글대장경> 김상일 번역) 한글대장경>
이렇게 두어 구절로 요약된 보우 스님의 생전 시대는 고려로부터 이어온 승과(僧科)가 중종(1506~1544 재위)의 즉위와 함께 폐지되고, 중종 33년(1538)에는 <동국여지승람> 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절들은 모두 불태우는 훼불(毁佛)로 이어졌다. 동국여지승람>
종로에 세웠던 최대의 사찰 원각사는 청기와를 8만 장이나 썼다는 큰 법당과 5만 근에 이르렀다는 구리종을 모두 헐어서 민가에 흩어주고 불상은 녹여 군기로 쓰는 등 종단의 비운을 맞았다.
하지만 "오십여 년 작희광"이란 말 속에는 명종 3년(1548) 9월 어느 가을 여행길에서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지우(知遇)를 얻어 궁중에 거처하며 봉은사의 주지로, 대도선사(大道禪師)와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조선 불교의 진흥에 몰두한 8년 세월이 있었다.
그리하여 연산군 이래 48년의 폐교(廢敎) 이후 여러 고을의 300여 정찰(淨刹)을 나라의 공인으로 높이고, 도첩제를 부활하여 2년 동안에만도 4,000여 명의 스님에게 도첩(度牒)을 내렸다. 임진왜란을 맞아 큰 공을 세우고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그 제자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모두 이때 승과 첫 회로 배출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선ㆍ교 양종을 반대하여 "보우를 죽이라"는 유림 쪽의 상소와 성균관 학생들이 동맹휴학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봉은사는 하루 10섬의 밥을 지을 만큼 인마(人馬)로 들끓었다고 했고, 보우는 일대의 법왕(法王)으로 조선 불교계를 통솔하였다. 뿐만이 아니고 유교의 상도(常道)와 불교의 권도(權度)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유석무애(儒釋無礙)ㆍ선교무애(禪敎無礙)"의 사상을 천명하는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4월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를 비난하는 유교 쪽의 탄핵상소가 무려 1,000여 통이나 몰려들었고, 왕후의 아우로 권신인 윤원형(尹元衡)마저도 보우를 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학계를 대표하는 율곡 이이(李珥)는 언관으로 그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상소했고, 결국 제주도로 압송된 보우는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에 이르렀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라는 한 마디 말에는 보우 스스로의 정치적 부침의 역사가 요약되고, "중의 탈"이라는 말 속에는 양종판사(兩宗判事)라는 종교적 위엄마저도 탈바가지로 희화하는 자기비판이 서려있다. 스님들은 이런 임종게마저도 남긴 이가 드물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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