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셋째를 가져 고민이에요. 맞벌이에다 솔직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요. 남편과 상의해서 지우기로 했는데 막상 수술을 해주는 곳이 없어요."
지난달 말 '한국여성의 전화'에 상담전화를 건 30대 중반 여성의 하소연이다. 지방에 산다는 그는 한달 수입과 지출내역까지 거론하며 낙태 시술을 해주는 병원을 알려달라고 떼를 썼다.
최근 이 곳의 문을 두드린 여고생 A양은 더욱 절박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했다는 사연이었다. A양은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성폭행을 입증할 고소장이나 판결문이 없으면 수술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며 "정식으로 고소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어떡하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낙태반대 모임인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가 지난달 초 불법 낙태수술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상당수 산부인과 병원들이 바짝 엎드린 채 낙태 시술을 거부하고 있어,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한 여성들이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일부는 낙태 생각을 접고 출산으로 가닥을 잡기도 하지만, 미혼모 등 피치 못할 상황에 처한 여성들은 원정낙태까지 감행하고 있다.
첫 아이 출산 1년 만에 최근 둘째를 덜컥 임신한 A씨는 고민 끝에 출산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남편이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 중이어서 혼자 집안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둘째까지 낳는 것은 무리였다. A씨는 "의사가 요즘 분위기에선 수술을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고 해서, 남편을 설득해 아이를 낳기로 했다"며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휴직해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일부 미혼모나 형편이 어려운 맞벌이 부부 등은 어쩔 수 없이 수술을 받을 수 밖에 없다며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 김두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낙태 상담사례가 예전 한 달에 4, 5건이었지만 지금은 평균 20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성폭행 피해자들조차 궁지로 몰리고 있다. 여성단체 진료의뢰서만으로 수술에 응했던 병원들이 "성폭행 피해를 입증할 증거를 가져오라"며 엄격한 근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우리나라 여성들은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는데 누가 낙태를 위해 고소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수술을 받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보니 위험부담을 안고 이들을 겨냥한 시술소가 등장하고 수술 비용도 최고 10배 가량 뛰었다. 김 활동가는 "상담 결과 건당 30~50만원이던 수술비가 300만원까지 올랐다"고 전했고, 한 산부인과 의사는 "일부 지방 조산원이 수술을 해주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는 아예 중국으로 떠나 수술을 받고 있다. 중국 상하이의 병원 서너 곳이 별도의 한국인 상담원과 의사를 두고 한국인을 상대로 낙태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선미 여성민우회 활동가는"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쉽게 낳겠지만, 어려운 형편의 여성들은 고액의 수술비 부담까지 져야 한다"며 "낙태 수술을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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