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박혀 자극만을 취하는 힙합이나 감각 일색의 아이돌 후크 송이 주류 음악계를 능멸하고 있는 지금, 일각의 음악 인구는 차라리 과거의 전설들에게 돌아가 새로움과 진정성을 구하고자 한다. '레전드의 소환'은 불가피한 트렌드다. 록의 황금기인 1960년대와 그 견인차인 일렉트릭 기타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불러내야 할 레전드는 지미 헨드릭스다. 기대에 부응하듯 지미 헨드릭스는 미공개 신곡이 수록된 사후 40년 만의 신보를 가지고 막 부활했다.
꼭 40년 전인 1970년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하기 전 그는 내놓은 음반마다, 서는 무대마다 경천동지의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그의 기타 연주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그룹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는 꽤나 잘난 줄 알았던 자신을 애송이로 무시하는 지미 헨드릭스의 담대함에 눌렸고,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서둘러 그의 무대 출연을 주선했다.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은 지미 헨드릭스가 죽은 날 하루 종일 울었다고 고백한다. '한국 록의 대부'인 신중현에게도 필생의 영웅은 지미 헨드릭스다.
그는 소음인 디스토션을 거칠게 극대화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려 유례없는 큰 덩치의 사운드를 꾸려냈다.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흑인음악 블루스는 역동적인 록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없었으면 록은 사운드와 정신의 지향을 못 찾고 허둥댔을 것이다. 그는 1967년 몬터리 팝 페스티벌에서는 연주 후 기타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으며,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는 기타 한 대로 신성한 미국 국가를 총탄과 포격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사운드트랙으로 재해석해내 당대 청춘들에게 반전의식을 고취시켰다.
지미 헨드릭스가 거대한 역사적 위상을 점하는 이유는 혁명적 기타 연주와 더불어 기존의 질서를 철저하게 거부한 반문화의 실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내 음악이 변화를 꾀하려는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수단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젊음의 분노와 포효로 무장한 그의 음악은 고루한 기성세대와 제도권을 향해 청춘의 요구를 들으라는 불호령이었다. 거절당했지만 실제로 당시 닉슨 행정부는 카운터컬처를 이해하기 위해 지미 헨드릭스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9일 전 세계에서 동시 발매되는 지미 헨드릭스의 새 앨범 '밸리스 오브 넵튠'(소니뮤직코리아)은 아득하지만 드높은 가치를 저장한 1960년대 후반의 뜨거운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곡인 타이틀곡을 비롯해 블루스맨 엘모어 제임스의 고전 '블리딩 하트', 기존 곡의 새로운 버전들에서 록을 관통해 흐르는 격렬한 기질, 조금의 상투를 허락하지 않는 비타협적 실험본능이 불을 뿜어댄다. 독자성과 예술혼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요즘 음악의 과잉 상업성이 무차별로 질타당하는 기분이다. 신보는 '지미 헨드릭스의 소환'을 계기화하면서 음악은 새 지평을 넘보는 창조적 태도를 섬기며, 젊음의 본령은 기성 질서의 탈출에 있음을 다시금 일깨운다. 질주하는 록 스피릿이 돌아왔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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