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올림픽 선수단의 선전, 특히 선진국형 스포츠라는 스피드와 피겨 스케이팅에서의 금메달 소식으로 대한민국은 자신감에 차 있다. 특히 경기를 치르고 난 후 선수들이 옛날처럼 '금'이 아니면 조용히 있던 태도에서 벗어나 은메달을 따고도 흥에 겨운 세레머니를 벌이는 모습은 마치 선진국 선수들을 보는 듯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얼음판을 즐겼다고 했다.
우리 바로 전 세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길은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사생결단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은 유학을 가서도 '죽어라' 공부 했다. 그에 비해 386 끝자락의 우리 세대는 공부를 그 전 세대보다는 즐기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나아진 덕도 있고 군부 독재 치하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한 것이 "공부를 왜 하는가"라는 자기 성찰로 이어진 덕도 있을지 모르겠다.
밴쿠버에서 날아오는 메달 소식들 사이로 유명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유서를 남겼다. 세상을 떠난 그는 초전도체 분야에서 선두에 선 과학자였다고 한다. 몇 년간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한 것이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로운 것인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굳이 따로 압박을 하지 않아도 과학자들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직장의 교수라 하더라도 자신이 매달리는 문제가 항상 풀리는 것이 아니니 학문하는 것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물론 그 이후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희열이 따라오지만). 스스로 전 세계의 동료들과 비교하고 받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연구는 즐겁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경쟁과 실패까지도 벗을 삼고 자신을 즐기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라는 걸 20년 넘게 연구하면서 깨달았다.
진정으로 과학 강국으로 가길 원한다면 이미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과학자들을 채찍질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하루라도 빨리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스타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과학자 일부를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과학자들을 줄을 세우고 필요 이상의 경쟁심을 부추겨서 결과물을 얻어내려는 시도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도 한국인으로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이런 이름은 영예로울 수 있지만 또한 엄청난 부담이다. 획기적인 결과들을 계속해서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잘 되지 않으면 연구 윤리 위반의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각양각색이고 연구 분야도 다양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즐길 수 있도록 자유롭게 놔두는 게 가장 좋은 정책일지도 모른다. 물론, 잠재력과 장래성은 평가하고 그 다음 자유가 주어져야겠으나 이미 우리는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일정 기간 그냥 믿고 춤추고 노래하듯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우리의 목표가 기껏 한 명의 노벨상을 배출하는 것이었을까.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처럼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도 메달이 나오고 여러 개 메달이 계속 나올 수 있는 저력의 과학 강국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가 아닐까.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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