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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6> 식민지 엘리트 교육, 경성제대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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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6> 식민지 엘리트 교육, 경성제대의 흔적들

입력
2010.03.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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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교육이 수입된 지 30여 년에 아직것 최고학부를 가지지 못하야 중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외국에 유학을 가지 않으면 그 이상 연구를 하기 어렵던 조선에서 대학을 가지게 된 것은 문화상은 물론이어니와 기타 각 방면으로 보아 대단히 반갑고 깃분 날이다. 그러나 나는 문간을 드러가면서부터 이상스러운 늣김을 가지게 되였다… 그 이유는 일언으로 폐지하면 '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는데 지나지 아니한다."('개벽' 1924년 7월호 기사 '경성제국대학 예과입학식을 보고서'에서)

일제는 식민지 젊은이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20년대 초까지 조선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간은 8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3ㆍ1 운동은 일제를 뒤흔들었다. 통치 위기를 겪은 식민지 당국은 당시 조선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대학 설립을 주도, '근대문명의 시혜자'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다. 도쿄, 교토 등에 이어 일제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이자 일본 밖의 첫 제국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은 이렇게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1924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의 유일한 대학으로 존재했던 경성제대는 3개의 캠퍼스를 거느렸다. 의학부가 현 서울대 의대 자리인 종로구 연건동에, 법문학부가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자리인 종로구 동숭동에 자리했다. 이공학부는 현 서울산업대 캠퍼스가 있는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각별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곳은 학부 캠퍼스가 아니라 일종의 예비학교인 '예과'다. 당시 수험생들은 바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예과시험에 합격한 뒤 2년(1934년부터는 3년) 동안 이곳에서 외국어 등 기초교양을 쌓고 학부로 진학했다. 한해 200명 안팎만 뽑았고 조선인 학생들은 50명 정도에 불과해 예과 합격자 발표는 라디오로 생중계될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최고의 엘리트인 만큼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예과생들이 걸쳐 입고 다니던 검은 망토는 '마술의 망토'라고 불렸다. 이 망토를 걸친 예과생들이 전차를 타면 차장이 한번 더 쳐다보고 장안의 아가씨들은 오금을 펴지 못했다고 한다.

유서깊은 경성제대 예과 건물은 많은 이들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재도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1동 235번지. 청량리역사 북쪽에 위치한 한림대 치과병원 부속건물이 1924년 세워진 경성제대 예과 본관 건물이다. 당시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청량한 느낌을 줬다는 교사 뒷편의 소나무숲은 아파트 단지로, 당대의 최고 수재들이 드나들던 정문 자리는 치과, 안과, 부동산, 비만클리닉, 고시학원 등이 밀집한 복합상가로, 조선인 학생들이 축구와 농구를 하며 민족의 울분을 달래던 운동장 자리는 세무서로 변모했다. 하지만 붉은 벽돌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예과 본관 건물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방 후 잠시 경성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된 경성제대의 운명처럼 이 건물 역시 신산한 역사를 겪었다. 해방 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대 치의예과 부속 연구소로 이용됐고, 이후 한 민간종합병원 병동으로 사용되다가 1999년 폐원된 뒤 식당, 세무서, 찜찔방이 들어선 상가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2007년부터 한림대 의대가 강의실, 세미나실로 이용하며 건물의 역사성을 되살렸다. "건물이 고풍스러워 발을 디딜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민우(23ㆍ한림대 의대 본과 3년)씨는 "당대의 수재들이 수학했던 곳에서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니 느낌이 새롭다"고 말했다.

15만4,000평이라는 넓은 부지에 자리잡은 서울산업대는 1941년 경성제대 이공학부 캠퍼스로 조성됐다. 대학 개교 후 17년이나 지나 이공학부를 세운 것은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한 뒤 기초과학 분야의 인력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9㎞나 떨어진 곳에 캠퍼스를 조성한 이유는 지금도 캠퍼스 인근에 철도(경춘선)가 지나가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질소비료공장이 있던 평남 흥남시, 수력발전소가 있던 평남 부전군 등 북선(北鮮) 지역은 일제시대 최대의 공업지대였는데, 공릉동 일대가 북선으로 연계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캠퍼스에서 진행된 연구도 이른바 '전시연구'였다. 1943~46년 이곳에서 수학한 장세헌(88) 서울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북아현동 집에서 아침이면 별을 보고 나가 밤에 별을 보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며 "학부시절 과산화수소 분해연구팀에 참가했는데 이는 로켓 연료 개발의 기초연구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1호관, 2호관으로 불렸던 건물들은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독특한 제국주의 건물 양식을 갖고 있는 탓에 '제3공화국' 같은 역사 드라마나 '공동경비구역 JSA' 등 영화의 촬영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해방 후 경성제대는 혹독한 청산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 유산은 여전하다. 이공학부 건물은 서울대 공대가, 법문학부는 서울대 문리대가 1970년대까지 사용했고 연건동 의학부 본부는 여전히 서울대 의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이희승(국어학자), 김석형(김일성대 역사학부 교수) 등 600명 안팎의 조선인 경성제대 졸업생들은 해방 후 남북의 최고 엘리트로 행정ㆍ사법ㆍ의학ㆍ교육 등 각 분야에서 양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깊은 법. 어렸을 때부터 식민지 교육을 받고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지식계급이었던 경성제대 출신들은 많은 이들이 고등문관 시험을 통해 식민지 고급관료로 진출했고, 대학마저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던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협력해 '친일'의 오해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경성제대는 식민통치의 잔재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를 외면하던 학계도 친일과 반일의 틀을 넘어 최근 경성제대가 식민통치 기관이었는지 근대 대학이었는지, 혹은 경성제대 출신들의 엘리트주의 유산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것인지 등에 대해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1943년 의학부를 졸업한 주근원(92)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3년 낸 회고록 <함춘원의 회상> 에서 "역사에는 영광도 있고, 치욕도 있고,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고,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고 전진도 있고, 후퇴도 있고, 정상도 있고, 탈선도 있고, 환희도 있고, 비애도 있다"고 적었다. 경성제대 개교 광경을 목격한 식민지 시기 '개벽' 기자의 서글픈 감상처럼, 경성제대 역시 이 땅에 '이식'된 근대의 한 표상일 것이다. 지금은 빛바랜 경성제대의 흔적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경성제대 의학부 '조선인 체질인류학' 연구 주도

경성제대는 태생적 성격상 일제의 식민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관학 아카데미즘'의 산실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성제대 의학부 해부학교실 주도로 진행된 체질인류학 연구는 '조선인'이라는 인종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로, 다양한 주제와 방대한 데이터 때문에 일본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연구였지만 조선총독부라는 식민통치기구의 존재는 본토라면 오히려 기대하기 어려웠을 편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생체 계측과 골상학적 연구가 동시에 이뤄졌다. 1934년 발표된 '조선인의 체질인류학적 연구'는 전국 13개 도의 남녀 2,216명의 신체를 측정해 분석한 연구다. 지방별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인구 이동이 활발한 도청 소재지를 피해서 피계측자를 선정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1934년 발표된 '조선인의 혈액형 연구'는 내선일체라는 일제의 허울좋은 선전에 과학적 기반을 제공해준 연구로 꼽히기도 한다. 함경남북도로부터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2,492명의 혈액을 채취했다. 이 연구는 만주와 몽골, 조선, 일본을 연결해 고찰했을 때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비슷해진다는 결론을 도출, 총독부의 동화정책을 강화하는 데 이용됐다.

황상익 서울대 의사학교실 교수는 " 경성제대 의학부의 연구는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인종적 우월성을 확인함으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일제의 정치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고 말했다.

■ 일본은 왜 조선에 '제국대학'을 설립했나

조선총독부는 1924년 경성제대의 설립을 확정했다. 일제가 식민지에 설립한 최초의 종합대학(university)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유일한 대학으로 식민사회 위에 군림했다. 물론 식민통치가 '문명적 과업'임을 과시하고 토착 엘리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식민지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당시로선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이미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에 대학을 설립했다. 하지만 일제의 경성제대는 이들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이들 대학이 대체로 식민본국보다 열등한 위상을 가졌다면, 경성제대는 식민본국의 대학 중에서도 최고 위상인 제국대학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마찬가지로 서구 열강에 의한 개방을 경험했던 일제는 서양의 발달된 학문체계를 신속하게 따라잡기를 원했다. 또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엘리트 양성도 절실했다.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선택과 집중'의 산물이 바로 제국대학이었다. 국가 엘리트의 충원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과 연구에 있어서 제국대학이 일본 내의 다른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했음은 물론이다. 대학은 커녕 전문학교뿐이었던 식민지에 설립된 경성제대의 위상은 더욱 현격했다. 전문학교에 비해 2년 이상 교육기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립 이후 경성제대는 입신출세의 상징으로 식민지 진학 경쟁의 정점에 섰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제국'대학을 식민지에 설립했던 것일까?

우선 식민통치의 위기상황 속에서 식민지를 일본과 다름없이 취급하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제스처가 필요했다. 제국대학이라는 위상은 동화정책의 구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였다. 더욱이 일찍부터 식민사회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대학 설립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점은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기독교대학, 조선인들의 민립대학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제국대학의 조속한 설립이 필요했다. 또한 '급진화'될 우려가 있는 조선인들을 식민지에 묶어두고, 지식의 독점적 창출을 통해 식민지의 '지식-권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했다.

결국 경성제대의 설립은 조선인들에게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기 위한 일종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진학 경쟁을 빙자하여 조선인들을 교육기회로부터 배제하고, 실증적 과학을 빙자하여 통치적 관점에서 창출된 식민지식에 권위를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적 통치기구가 이로부터 출현했다. 하지만 제국적 보편을 표방하는 특권적 기관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주의적, 진보적 사상의 온상이 되기도 했고, 근대적 학문분야의 체계적인 학습장으로도 기능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정준영 한림대 일본학중점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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