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이 쌓아 올린 돌 사이에 TV가 있고, 그 화면 속에도 돌이 쌓여 있다. TV 모니터 속 돌의 영상이 진짜 돌탑의 일부가 된 셈이다. 영상과 실재가 혼합돼 일체를 이루면서 동양적 정서를 드러내는 이 설치 작품 '무제'가 만들어진 것은 놀랍게도 32년 전이다. 우리 미술사에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기록된 박현기(1942~2000)에 의해서다.
그는 국내에 컬러 TV가 보급도 되기 전인 1970년대부터 TV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가다. 하지만 너무 시대를 앞선 탓에, 또 58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탓에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박현기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이 9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2년 전 그의 고향인 대구에서 회고전이 열린 적은 있지만, 서울에서는 처음이다. 1978년의 초기작부터 1999년 선보인 마지막 작품까지 대표작 20점이 전시장에 설치됐다.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다가 건축으로 전공을 바꾼 박현기는 1970년대 초반 대구에서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4년 미국문화원 도서실에서 백남준의 1973년 작 '지구의 축'을 접한 것을 계기로 비디오아트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차례로 참가하며 한국 비디오아트의 존재를 알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물 기울기'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마치 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연출한 TV 모니터를 작가가 직접 들고, 모니터를 기울이는 각도에 따라 물의 기울기가 달라 보이는 상황을 담은 작업이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백남준에 비해 박현기의 작품은 유독 동양적인 색깔이 강하다. 첨단의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정적이고 관념적인 내용들을 담아냈다. 둥글게 휜 철판의 양 끝에서 돌의 모습을 상영하는 TV와 진짜 돌덩어리가 균형을 맞추고 있는 'TV시소'(1984)는 이우환의 조각을 연상시킨다. 1981년 작 '무제'에서는 낙동강변의 돌을 전시장에 옮겨놓은 뒤 그 돌을 스크린 삼아 돌을 줍는 과정을 찍은 영상을 투사했다. 눈 앞에 존재하는 것과 재현된 이미지의 차이에 질문을 던진 작업이다. 유독 돌을 소재로 많이 삼았던 박현기는 생전에 "돌 작업은 서구 과학의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그의 작업은 TV 모니터를 벗어나 다양한 프로젝션 작업으로 확대된다. 바닥에 깔아놓은 밀가루 위에 만다라의 이미지와 포르노 동영상을 함께 비춘 '만다라'(1997), 둥근 접시에 일본 지진과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공사장 폭발 사건의 영상이 흐르는 '우울한 식탁'(1997) 등이 대표적이다. 1999년 작 '현현'은 흰 대리석 위에다 계곡 물에 비친 나무와 돌의 고요한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전시 서문을 쓴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박현기는 비디오라는 생소한 매체를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한 작가였지만 적절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에서 배제돼왔다. 그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성좌이자 미완의 과제"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번 전시가 상업화랑이 아닌 미술관에서 열렸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28일까지. (02)2287-3500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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