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해 전쯤 영국의 한 대학에 학생 신분으로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연수 목적으로 나갔다가 내친 김에 학위과정에 등록을 한 것이었다. 대학 졸업한 지 근 20년 만에,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도서관이나 기숙사 방에서 종일 책 냄새를 맡으며 지내는 것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말이 설어서 그렇지, 그들의 커리큘럼이 우리나라 대학들보다 뛰어나다거나 수업내용이 별다른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인상 깊었던 것은 학기 초부터 귀가 닳도록 강조하는 표절(plagiarism)에 대한 경고였다.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수업과정 소개 책자에는 표절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어떤 것들이 표절에 해당하는지 상세한 예시, 표절이 드러날 경우 받게 될 불이익 등이 여러 쪽에 걸쳐 소개돼 있었다.
수업내용과 독서자료를 인터넷으로 미리 제공하는 학과 홈페이지에도 표절에 대한 문답식 교육자료가 전자파일로 따로 올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학기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가 이어졌다. 실제로 기말 에세이 일부분이 표절로 판정돼 퇴학의 위기에 처한 학생의 사례도 간간히 전해졌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평가의 엄정함이었다. 논문은 말할 것도 없고, 매 학기말 과목별 에세이도 담당 교수 외에 전공자인 다른 교수가 반드시 더불어 평가를 하도록 했다. 각자가 점수를 따로 매긴 뒤 최종 평점을 협의해 결정했다. 둘 사이에 합의가 안 되면 외부의 해당분야 전공자에게 의뢰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했다. 이중삼중의 교차평가를 하기 때문에 평가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학생들에게는 최종 평점뿐 아니라 자세한 평가내용을 알려줘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엄정한 평가는 졸업생들의 성적표와 추천서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준다. 영국 사회에서 취업이나 진학 때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보다는 학점이 어땠는가가 더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단편적인 경험을 소개했지만, 적어도 이런 나라에선 학교에서 편법과 거짓이 발붙일 여지는 없어 보였다.
정직한 사회의 바탕은 말할 것도 없이 가정과 학교다. 세상이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학교에서부터 배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학교에서 부정과 편법과 거짓을 노골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몇 년 전 입시에서 내신성적 비중이 높아지자 내신 부풀리기가 만연하더니, 지난해에는 초ㆍ중ㆍ고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성적조작 사실이 드러나 크게 논란이 됐다.
최근 불거진 자율형 사립고 부정입학 사건은 이러한 사례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 와중에 서울시 교육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시교육청은 간부들의 조직적인 인사비리로 악취를 내뿜고 있다. 학교장들의 이권관련 비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교수들의 논문 표절시비, 그 때마다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인 교수사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학점 뻥튀기 등.
일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대다수 교사와 교수들은 교육현장에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예외로 돌리기엔 비리 불감증이 너무 넓게 퍼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든다. 학교에서부터 거짓과 꼼수를 배워 세상에 나온 이들이 만들어갈 사회가 어떠할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상철 사회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