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화요일 오전에는 1학년들 교양학부 수업이 없었다. 전날 저녁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대생들이 깡패의 습격으로 수십 명이나 부상당하는 큰 사건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임시로 기숙하고 있던 길음동 친구네 집에는 신문도 라디오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느지막이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혜화동 로터리쯤에 이르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온몸으로 감지되었다. 이웃해 있는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막 자기네 교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행인들의 표정에 일말의 긴장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당도하니 학생들이 드문드문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이 보이고, 온통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데모의 주력부대는 이미 교정을 떠난 뒤였다.
나는 시위대를 뒤쫓을 생각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술대 교문 앞을 돌아 창덕궁 쪽으로 가는데, 시골뜨기의 눈에 비친 봄의 거리는 시국과는 상관없이 화사하기만 했다. 그러나 멀리 한국일보사가 보이는 안국동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딴 세상으로 변했다. 점점 더 많은 군중이 인도를 메웠고, 중앙청 쪽에서는 쫓기듯 뛰어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나는 지금의 체신기념관 앞에 서서 질주하는 트럭을 바라보았다. 트럭 위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손을 흔들며 "총을 쐈어요! 사람이 죽었어요!" 하고 군중을 향해 외친 것 같았다. 나는 부르르 떨리는 격정과 두려움이 심장을 훑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한낱 구경꾼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을 뿐, 끝내 시위 대열에 참가하지 못했다. 25일 교수데모 때에도 멀찍이 따라가며 행렬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 종로 2가에 이르자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계엄령 선포로 수그러들 듯하던 데모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구호도 이제는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피의 보답과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한 마디로 4월 19일부터 26일 사이의 서울 거리는 학생의거가 민중항쟁으로, 그리고 다시 시민혁명으로 진화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현장에 있으면서도 나는 통금이 7시로 당겨진다는 소문이 들리자 솔직히 말해 하숙집 찾아갈 걱정부터 앞섰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이승만 정권의 붕괴 이후 학원은 다시 본연의 안정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었음에도 내가 다니는 대학은 시국의 격동에 크게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제국대학 시절의 유풍인 상아탑의 관념이 남아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속해 있는 외국문학 전공 학과가 유난히 정치에 무관심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나에게 대학은 지적 개방성이 넘치는 자유롭고 활기찬 곳이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 신선한 감격이었고, 그후 40년이 넘는 대학생활을 통해 한번도 다시 되풀이되지 않은 유토피아의 체험이었다. 아무튼 시골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교복의 억압 뒤에 숨은 '사상계' 애독자이고 함석헌 숭배자였지만, 대도시의 새로운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서구문학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가정교사 노릇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할 처지였으므로 강의실과 도서관 이외에는 다른 데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내 시선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의 이런 평온과 자유는 실은 내가 속해 있는 문학서클의 이념적 제한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 서구문학의 전위적 경향에 매료되기 마련인 우리 외국문학도의 눈에 민족현실의 당면한 심각성은 제대로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 나라의 지적 유행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사회의 심층에서는 오랫동안 국가권력의 폭압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온갖 정치적 불만과 사회적 모순이 폭발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권력이 약화되고 규제가 느슨해지자, 금기에 묶여 있던 '위험사상'의 뚜껑이 열리고 여러 분야의 민중운동 세력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1919년 3ㆍ1운동 이후의 몇 해나 1945년 해방 직후의 두어 해, 그리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서너 해에나 비견됨직한, 한국 근대사의 끝없는 먹구름 사이로 언뜻 보인 "티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과도 같은 해방의 축제였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4월혁명은 일차적으로 이승만 체제의 거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 자신이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집권기간 내내 반공과 함께 방일(防日)을 정책적 표어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의 본질은 일본 대신 미국을 모델로 하는 식민지체제의 수ㅑ聆퓽?계승이었다. 일제시대에 탄압받은 인물은 이승만 치하에서도 탄압의 대상이 되고 일제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계층은 이승만 치하에서도 상층부를 구성하게 된 사실이 단적인 증거였다. 따라서 혁명에 의해 열린 자유의 공간이 '민족'을 다시 역사의 동력으로 호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학생시위가 진행 중이던 4월 21일에 벌써 전래의 민족운동과 각계의 사회운동을 통일적으로 연결하려는 논의가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별ㆍ단체별로 꾸준히 계속되어 9월에는 마침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라는 이름의 통합조직 결성으로 성사되기에 이른다.
민자통은 유림의 최고 원로 김창숙 선생을 대표로 내세운 통합적 민족운동조직이었지만, 그 주력부대가 사회대중당 등 혁신세력과 교원노조ㆍ출판노조 등 진보적 지식인의 결합체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일제시대부터 때로 협력하고 때로 대립하면서 복잡한 자체분열을 거듭해온 이 나라 민족운동의 양대 조류라 할 터인데, 나 같은 문외한이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분단의 극복이라는 전형적인 민족적 사업이야말로 어떤 이념보다 앞서는 최우선의 과제라는 점에서 민자통의 출범은 뜻깊은 것이었다. 그 자장 안에서 1960년 11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고 곧 여타의 대학들로 조직이 파급되어 학생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들이 만든 구호("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는 통일의 비원을 품고 사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놀라운 선동성을 발휘했던 사실이 기억에 새롭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5ㆍ16 군사쿠데타는 좌경적 색채를 띤 혁신정당들뿐만 아니라 온건한 성향의 사회ㆍ문화단체 전반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철퇴를 가했다. 예총이나 문협처럼 시종일관 정부 정책에 순응했던 단체들도 일제히 해산을 당했던 것이다. 한때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개념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파괴자요 민족이념의 배반자인 그들이 다름아닌 4월혁명의 시대정신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5ㆍ16의 자기모순이다. 어떻든 민족운동의 전위적 부분들이 5ㆍ16으로 커다란 손상을 입었음에 비하면, 1960년대 이후 연구와 창작이라는 자기 고유의 작업을 통해 민족적 지향을 추구한 국사학과 문학 분야에서의 업적은 눈부신 것이다. 식민지사관의 극복을 위한 실증적 연구와 거대한 민족문학의 성과들은 이제 그 자체가 계승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유산으로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 또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열 살 무렵에 6ㆍ25전쟁을 맞았으며, 그 후 줄곧 강압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살벌한 반공교육을 받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죽음을 보고 모진 궁핍에 시달리며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고 난 뒤에도 우리의 정치의식은 아직 유치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4ㆍ19혁명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금지와 억압의 독재체제에 대한 민중저항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지만, 우리들 개인사에서도 세계를 보는 시야의 획기적 확장이고 자아와 공동체의 일치가 실현되는 황홀의 경험이었다. 후일 유신독재의 암흑이 천지를 짓누르던 시절, 한 시인은 4월의 함성을 기억하며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형제들의 그림자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날의 함성을 환청으로 들으며
비문을 읽는다 피의 거리의, 피의 거리의
어둠에 떠는 어둠의 소리를 읽는다
_ 최하림의 시 '1976년 4월 20일' 부분
오늘 이 시가 더욱 절실하게 울리고 그날의 함성이 환청처럼 들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를 요구하는 현실 속에 여전히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약력
▦1941년 강원 속초 출생ㆍ본명 염홍경 ▦서울대 독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978년 창작과비평사 대표 ▦1980~2007년 영남대 독문과 교수 ▦2003~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저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모래 위의 시간> 등 ▦팔봉비평문학상, 단재상 등 수상 ▦현 6ㆍ15민족문학인협의회 공동대표, 영남대 명예교수 모래> 혼돈의> 민중시대의> 한국문학의>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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