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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법관모임 실태조사/ 70년대 日 청년법률가협회 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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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법관모임 실태조사/ 70년대 日 청년법률가협회 사건이란

입력
2010.03.03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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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은 40여년 전 일본의 '청년법률가협회(청법협) 사건'을 예로 들며 대법원장이 직접 우리법연구회를 해체해야 한다고 압박해왔다. 그러나 정작 청법협 사건은 일본 사법부의 독립성을 크게 후퇴시킨 사건으로 현재 우리상황에 대입하기엔 적절치 않은 사례라는 지적이 많다.

청법협 사건은 일본에서 좌우 대립이 치열하던 1970년대 초 자민당이 내세운 보수파 최고재판소 장관(한국의 대법원장)이 학술단체였던 청법협 소속 판사들에 대해 벌인 내부 숙청을 말한다. 냉전시대였던 60년대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선 자유주의 성향의 재판관들이 등장해 반정부적인 판결을 쏟아냈다. 당시 최고재판소는 공무원의 쟁의권을 인정하고(66년 도쿄중앙우체국 노조사건), 정부의 교과서 내용 검열은 위헌이라고 밝히는 등(70년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 당시 정부방침과는 배치되는 판결을 서슴없이 내렸다.

사법부를 눈엣가시로 여긴 자민당은 69년 보수파 이시다 가즈토(石田和外)를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임명해 전세역전을 시도했다. 우리법연구회를 연상시키는 청법협이 희생양이 됐다. "모든 정치적 입장을 떠나 헌법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창립취지로 54년 만들어진 이 단체는 변호사ㆍ법학자들로 시작해 57년께부터는 재판관들이 가입했다. 70년 당시 회원 2,300명 중 재판관은 225명으로 전체 재판관(2,500명)의 10% 가까이를 차지했다.

주로 순수 학술모임을 갖던 이 단체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유명한 히라가(平賀) 서간 사건을 통해서다. 삿포로의 지방법원장격인 히라가가 자위대 관련 사건을 맡은 판사에게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하라는 취지의 서간을 보냈고, 이 판사는 이 서간을 청법협 회원들에게 공개해 '재판권 침해'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후 이시다 장관은 청법협을 정치색채를 지닌 단체로 규정하면서 소속 판사들을 주요재판에서 배제하거나 재임을 거부하고, 탈퇴를 종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이시다 장관이 청법협을 해체시켰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청법협 홈페이지(www.seihokyo.jp)에 따르면 이 단체에는 현재 약 2,50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일본 전체 변호사의 15% 정도가 이 단체에 속할 정도로 건재하다. 판사들이 속한 재판관 부회는 이시다 장관이 물러난 한참 후인 84년에야 청법협에서 분리 독립했다고 이 홈페이지는 밝히고 있다.

마이니치(每日)신문 사회부장 출신 야마모토 유지씨가 당시 일을 기록한 책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를 국내에 번역한 김용찬 변호사는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일본 사법부가 독립성을 잃고 왜 정부에 종속적인 행정부서처럼 전락했는가"라며 "청법회 사건을 통해 얻을 교훈은 바로 사법부 독립의 중요성"이라고 말했다.

문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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