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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광화문 글판'을 보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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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광화문 글판'을 보는 아침

입력
2010.03.0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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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버스를 타고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광화문을 지나 시청 앞에서 내렸다. 차창 밖으로 흥국생명 빌딩 앞에, 미국 미술가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거대한 작품 '망치질하는 사람'이 여전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10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취재를 갔다가 전시장 수백m 밖에서도 보이던 이 작품에 놀라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망치질하는 사람'은 그 2년 후 서울에도 설치됐다. 버스가 광화문에서 우회전할 때쯤 '망치질하는 사람' 만한 크기의, 가로 20m 세로 8m의 '광화문 글판'이 보인다.

글판에는 지난 1일부터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마음을 환히 적시리라'(장석남의 시 '그리운 시냇가'에서)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찌푸린 아침, 마음이 환해진다. '망치질하는 사람'은 서울 말고도 프랑크푸르트, 시애틀, 바젤 등 세계 6개 도시에 설치돼 있지만 광화문 글판은 오직 한국에만 있다. 보로프스키의 작품을 서울에 들여온 것도 우리의 자랑이지만, 광화문 글판은 이들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다.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에 내걸리는 이 글판이 만들어진 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1991년 1월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아이디어였다. 처음 걸린 글귀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였고, 이후 1997년까지는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 혹은 '나라경제 부흥시켜 가족행복 이룩하자' 등 낡은 표어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997년 말 IMF사태가 닥치면서 신용호 창립자는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지금도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는 문구들은 그때부터 일년에 네 번, 계절이 바뀔 때 광화문 글판에 나타났다. 1998년 2월 내걸린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는 고은 시인의 시 '낯선 곳'에서 따온 글귀였다.

'착한 당신, 피곤해도 잊지 말아요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마종기의 시 '바람의 말'에서)이란 구절은 일상에 찌든 우리를 다독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봄.'(이성부의 시 '봄'에서)이란 시구는 희망을 전했다. 촌철살인 아니라 촌철활인(寸鐵活人)이었다. 군에서 갓 제대하고 미래를 고민하던 한 젊은이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란 글귀에서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장석주의 시 '대추 한 알'에서)란 구절을 이 글판에서 읽은 한 주부는, '남편 얼굴이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소주 몇 개, 삼겹살 몇 개, 맥주 몇 개'라고 멋진 패러디를 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을 남달리 사랑했다던 한 기업인의 작은 아이디어가 20년 동안 서울 한복판을 따뜻하고 환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도시의 품격을 바꾸고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20년을 넘어 우리는 내일도 광화문 글판을 보며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이 글판에 가장 많이, 일곱 번 글이 올라간 고은 시인은 "이건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문화행위가 되었다. 다른 나라 도시들도 교보생명의 시 잔치를 따라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서울을 찾는 외국 시인, 작가들은 실제 광화문 글판을 보고들 놀란다. 바로 그런 것이 문화의 힘이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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