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근대 군사학의 아버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 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 당대에 스포츠가 대중화되었다면 그는 아마 이런 말을 먼저 남겼을 것이다. '스포츠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전쟁론>
동서 냉전시대 적대국간에 열린 스포츠는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남북한전, 한일전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엄숙함이 선수들을 숨막히게 했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뛰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태극전사들이 보여준 모습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 이후에 태어난 이른바 '88둥이' 신세대들이다. 민주화된 토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박찬호와 박세리 그리고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보고 자랐다. 한국스포츠가 세계 최고 수준과 겨뤄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보고 성장했기 때문인지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스포츠 세대를 88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며 "88둥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꾼 부모세대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경기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훈련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재미있으면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이라도 흥미 없다고 판단하면 안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또 '쿨'(Cool)하다는데 있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으면 그뿐,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리스트 이상화(21)는 1,000m에선 23위에 그쳤다. 하지만 이상화는 "어차피 주종목도 아닌데요, 뭘. 나름 괜찮게 탄 것 같은데요?"라며 23등을 하고 즐겁게 인터뷰하는 선수는 저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피겨 여왕' 김연아(20)의 안무 코치 데이비드 윌슨(44)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기 전 연아에게 "국가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스케이트를 즐기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연아도 "준비한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어 너무 기뻤다"고 금메달 소감을 밝혔다. 김연아는 또 아사다 마오(20)를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내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초 금메달이 예상된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88둥이들은 은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과거처럼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판 위에서 큰 절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예상 밖의 광경을 연출하며 대한민국을 감동시켰다. 전문가들은 "우리사회가 1등만 기억하는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개인의 노력과 이에 따른 결과도 함께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며 "스피드스케이팅의 맏형 이규혁(34)의 눈물에 함께 가슴 아파한 것이 좋은 증거"라고 말했다.
최형철 기자 hc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