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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7> 구전 이경춘전(口傳李敬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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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7> 구전 이경춘전(口傳李敬春傳)

입력
2010.03.0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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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할아버지 이경춘(李敬春)은 글깨나 읽은 선비였답니다. 어머님이 갓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 책들이 방 구석구석 쌓여 있었고, 장마가 끝난 날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젖은 책을 널어 말리셨답니다. 책들은 할아버지가 세상 떠나신 후에도 상당 기간 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영남 유림의 마지막 세대쯤 되는 청년 선비 이경춘(李敬春)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1900년 무렵 경주 김씨 처녀 김봉이(金鳳伊)와 부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직장을 얻습니다.

아버님의 구전에 의하면, 아미동 산비탈 할아버지 무덤에는 일본식 목패가 세워져 있었고, '경부철도관리인 이경춘의 묘'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 이경춘(李敬春)이 얻은 직장은 이름 그대로 경부선 철도 관리직이었거나 철길을 놓는 노무자였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일본이 주도했던 도시 형질 변경 대규모 토목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1900년에서 19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부산은 일본식 식민도시로 건설됩니다. 몰락한 선비, 토지를 잃은 농민, 일본 유학 여비를 마련하기 위한 학생 등 전국에서 몰려든 조선 청년들이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동원된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 이경춘(李敬春) 또한 그 대열 속에 있었던 것이지요.

할머니 김봉이(金鳳伊)의 구전 가족사가 어머니 황두기(黃斗琪) 에게 그대로 옮겨진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부산은 용두산 용요산(일명 복병산) 용미산 세 산이 또아리를 튼 용 형상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일본은 부산을 철저히 자기네들 방식의 식민도시로 건설하기 위하여 부산의 지맥(地脈)을 잘라 길을 내기로 결정했다. 용두산 지맥을 잘라 용의 눈에 해당되는 중심에 쇠 못을 박고, 일본 신사를 세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잔존하고 있는 부산의 용두산 공원이다.

용미산 끄트머리를 뭉개고 매축하여 세운 것이 부산부 청사였고, 광복 후에도 오래 동안 부산시청으로 사용되었다. 근래 바로 이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세워졌다. 명당이어서 그런지 하루 매상이 30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가장 큰 난공사가 용요산 허리를 자르는 대역사였다. 현재 중앙동에서 대청동을 가로지르는 길을 내는 작업이었는데, 청년 이경춘(李敬春)은 바로 그 용의 허리를 자르고 길을 내는 작업 현장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밤에 꿈을 꾸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산이 울었다. 무너진 산 사이로 피가 배어나와 네 할애비가 놀라 헛소리를 지르며 잠을 깨었단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할아버지 이야기는 현실을 넘어 신화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사실도 개입합니다. "동래 선비들이 갓을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몰려와 땅을 치며 울었다."산 중턱에 인간 사슬 띠를 만들고 앉아 곡을 해 대는 선비들의 저항. 청년 이경춘은 바로 이 선비들의 저항을 ?고 길을 내어야 하는 악역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 번민과 갈등이 불길한 꿈으로 드러났고, 꿈의 계시는 그대로 현실화됩니다.

산을 허물다 많은 노무자들이 산사태로 깔려 죽었고, 노무자들의 시체를 그대로 파 묻으며 길은 열렸다. 그 길 따라 시장이 열리고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세워지고 길 끝에 법원이 자리잡았다. 해방이 되자, 산사태가 나 노무자들이 깔려 죽은 바로 그 자리에 백색 미국문화원 건물이 들어섰고, 1982년 문부식 군의 화염병 투척으로 건물이 검게 거슬렸고, 지금은 부산 근대사 박물관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

용요산 허리를 자르는 영선공사를 끝낸 청년 이경춘(李敬春)은 결국 어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천벌을 받습니다. 술과 노름으로 망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장티푸스에 걸립니다. 이 모든 번민과 병고로부터 회복될 즈음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내 김봉이(金鳳伊)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던 이경춘(李敬春)은 거부를 당합니다. 장티푸스에 걸린 환자, 특히 회복기에 접어든 남자에게 잠자리는 치명적이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 들은 아내가 한사코 거부한 것입니다. 화가 난 이경춘(李敬春)은 그대로 집을 나가 일본인이 세운 사창가 미도리 마치(완월동)로 향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영남 선비 이경춘(李敬春)은 34세의 짧은 생애를 허무하게 마감합니다. 어머니는 이 대목에서 꼭 복상사(腹上死)란 말을 짓궂게 사용합니다. "네 할애비는 천벌을 받아 복상사했단다." "왜 하필 그런 상스런 말을 쓰는거요"하고 역정을 내면, 할머니가 전해 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혀를 차십니다. "그 망할 영감이 날 내버려 두고 나가더니 그만 복상사했다." 그러면서 김봉이(金鳳伊) 할머니는 혀를 끌 차셨다고 합니다.

지독한 세타이어!(satireㆍ타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빈정댐)

사랑을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했던 청년 선비 이경춘(李敬春)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 웃음거리가 되면서 이 지상에서 어이없이 사라졌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선비로서의 태도와 체면도 포기하고 식민도시 경영에 뛰어든 조선의 마지막 선비 세대. 그들이 걸었던 개화와 새로운 세계에의 길 트기는 결국 스스로 조선의 지맥을 파헤치는 자학적 몸부림에 이르렀고, 결국 타인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할아버지 이야기인데, 왜 지금 내 등에 땀이 나지요? 할아버지의 영혼이 내 혈관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런지 남의 느낌 같지 않고, 먼 옛 이야기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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