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겨울이 아쉬워 또 한번 설산 산행을 하기로 한 뒤 그 대상지로 소백산을 택한 것은 1월 덕유산 종주 때 만났던 순천 효산고 선생님들의 추천 때문이었다. 눈 내린 덕유산도 좋지만, 소백산의 설경 역시 그에 못지 않다는 은근한 부추김이 있었던 것이다.
소백산은 1990년대 초 철쭉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 한번 간 적이 있는데 당시 산 위에 펼쳐진 넓디 넓은 초원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하얀 눈이 그 위를 덮어 만든 산상의 은세계가, 푸르고 맑은 하늘과 조화를 이룬 멋진 경치를 상상하면서, 눈이 녹기 전에 어서 소백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에 걸쳐있는 국립공원 소백산은 한국 12대 명산의 하나로 초원, 철쭉, 설경 등으로 유명하다. 산세가 부드럽고 식물상이 풍부한데다 계곡과 사찰이 많고 주능선이 백두대간 길이어서 사철 등산객이 찾는다.
소백산에는 여러 등산코스가 있는데 서울에서 가는 등산객들은 기찻길이 연결된다는 이유로 희방사를 기점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희방사에서 연화봉(1,383m)을 거쳐 최고봉인 비로봉(1,439m)에 오른 뒤 단양의 천동 또는 영주의 비로사로 내려가거나 아예 더 멀리 국망봉(1,421m)으로 가기도 한다.
새벽 기차를 타고 희방사역에 내리니 하늘이 잔뜩 흐려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소백산 초입의 희방폭포는 28m 높이의 꽤 큰 폭포지만 얼음이 많고 떨어지는 물살의 힘도 약하다. 폭포를 거쳐, 신라 선덕여왕 때 지었다는 희방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사실 이 길은 가파르기로 악명이 높다. 주능선까지 1시간 30분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인데 숨이 턱턱 막힌다. 게다가 지금은 겨우내 내린 눈이 사람들의 발걸음에 다져져 얼음으로 변해 있다. 그러다 보니 꼭 얼음 덮인 미끄럼틀 같은 길이 됐다. 아이젠을 하고 스틱도 들었지만 발을 내딛는 게 무척 조심스럽다. 경사가 심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렇게 40분 정도 올랐더니 이내 피로가 밀려온다. 나무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30대 남자 3명이 내려왔다. 산에 들어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새벽 4시 비로사를 출발, 비로봉에 올라 이곳까지 왔는데 6시간의 산행 동안 산새 6마리를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 그 말에, 혹시 이 산에서 홀로 헤매는 것은 아닌지, 더 걱정이 됐다. 그들과 헤어진 뒤 다시 5분 정도 오르니 길이 한결 완만해졌다. 대신 이번에는 안개와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낮게 깔린 안개 때문에 10m 앞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온 산을 다 쓸어버릴 듯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휘몰아친다. 그나마 기온이 낮지 않아 다행이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악 기후는 더 가혹해질 것이다.
이 산은 등산로가 평이해 일부러 벗어나지 않는 한 길을 잃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며 무념의 상태로 위를 향하다 보니 어느새 연화봉이다.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의 봉우리인데 오늘은 시커먼 하늘과 바람, 운무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정표에 붙어있는 하얀 얼음을 보면서 날을 잘못 잡았다는 후회와 함께 걱정이 밀려 왔다. '빨간 등산복을 입고 있으니 눈에는 잘 띌 거야', '헤드랜턴을 갖고 왔으니까 전구를 켜면 구조는 쉽게 될 거야' 하며, 애써 마음을 달랜다.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4.3㎞ 거리이니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이런 날은 산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최상이라는 생각에 비로봉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능선은 눈이 쌓여 푹신하기 때문에 나뭇가지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한 달리는데 지장은 없다. 그렇게 30분을 뛰다가 어느 한 순간 유난히 안개 짙은 곳에 이르자 저절로 발이 멈춰졌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 같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이상 야릇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일렬로 서있는 나무들은 미지의 땅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보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목을 축인 뒤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곳 역시 등산로가 이어진 길이었다. 만화에나 나올법한 상상을 한 것 같고 두려움을 스스로 만든 것 같아 조금 쑥스러웠다.
산에 든 지 2시간이 넘으니 조금씩 정신이 난다. 사진 촬영을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도 그때 깨달았다.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걷는다. 안개 때문에 시원한 조망 사진을 찍기는 틀렸지만, 그래도 이것 저것 다 촬영을 하다 보니 걷는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어느 한 순간 젊은 남녀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희방사 위에서 만난 남자 일행 말고는 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다. 악천후 속에서는 누군가가 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잠시 뒤 이번에는 맞은 편에서 50, 60대 일행 4명이 나타났다. 덕유산 산행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산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아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 한 명, 두 명 만나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어느덧 비로봉이다. 다른 등산로로 올랐던 등산객들이 비로봉에 오른 뒤 나무 계단으로 내려온다.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 눈을 뜰 수 없는 거센 바람을 뚫고 내려오는 그들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나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드디어 비로봉에 도착했다. 최고봉답게 바람과 운무도 가장 심해서 정상 표지석, 주요 기점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 말고는 보이는 것이 거의 없다. 뿌듯하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곧바로 천동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는데 희방사 길보다는 한결 수월하다.
2시간 정도 걸어 천동에 도착하니 그제야 해가 나타났다. 오늘 내내 구름을 드리우다가 이제서야 제 모습을 보여주니 살짝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니 소복하게 눈이 앉은 계곡의 음영이 도드라지고 오늘 올랐던 소백산의 부드러운 산세가 드러났다.
가는 겨울이 아쉬워 찾은 소백산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그러니 아직도 눈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눈이 다 녹기 전에 한번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설량으로 보아 소백산의 눈은 한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도 일행이 있으면 크게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여행수첩
-소백산 등산로에는 기점이 여럿 있다. 희방사 코스를 오르려면 희방사역에서 내리면 되며, 비로사 코스로 가려면 풍기역에서, 천동코스로 오르려면 단양역에서 각각 내려 택시나 버스 편으로 갈아타면 된다.
-소백산은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날이 좋아도 아직은 방풍복과 방한복을 준비해야 한다. 아이젠과 등산용 스틱도 필요하다.
-천동에는 멋진 동굴이 있다. 고수동굴, 노동굴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하산 후 동굴 여행을 해도 좋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를 경우 도착지의 대중교통편과 시간대를 알아놓아야 한다. 도시처럼 버스편이 많지 않기 때문에 버스를 놓치면 여러 모로 불편하다.
-소백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054)638-6196, 소백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043)423-0708
박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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