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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페인 그라나다, 굴복의 역사 깃든 알람브라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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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페인 그라나다, 굴복의 역사 깃든 알람브라 궁전

입력
2010.03.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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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의 아침, 알람브라(Alhambra)로 향하는 길이다. 버스 안에선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흘러나왔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도, 잔뜩 기대에 들뜬 마음의 현(絃)도 덩달아 트레몰로로 요동쳤다.

스페인의 가장 남쪽 지역인 안달루시아. 지중해와 대서양을 아래에 두고 1년 3,000시간 햇빛을 자랑하는 태양의 대지다. 페니키아인부터 아랍인에

이르기까지 예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비옥한 땅이다. 그 중 안달루시아에 가장 풍요로운 문화를 남긴 민족은 아랍인이었다. 1492년 가톨릭 왕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780여년 아랍인들이 유럽의 이슬람 문화를 찬란히 꽃피우던 중심이 안달루시아다. 그 중에서도 그라나다는 아랍인들이 마지막까지 요새를 굳건히 하고 지켰던 곳이다.

1236년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의 지배권을 빼앗긴 아랍인들은 그라나다로 피신했다. 그들은 알람브라 요새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250여년 동안

'유럽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도시로 버텨오다 결국 항복했다.

그라나다가 지닌 아름다움의 절정은'알람브라'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인도의 타지마할과 견주는 곳이다.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그 서글픈 종말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는 알람브라를'사멸 직전의 찬란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찬미했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부부가 그라나다로 진격해 왔을 때 무슬림의 마지막 군주 보압딜은 결국 굴복의 입맞춤을 하고 성을 떠나야 했다. 보압딜은 수십만 되는 무슬림들의 종교와 재산권, 상권을 유지시켜 주는 조건으로 그라나다를 무혈인계했건만 가톨릭 왕국은 곧장 이방인들을 솎아내 개종을 명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에겐 죽음 아니면 추방만 따랐다.

그라나다시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알람브라. 기독교인에게서 버림받아 오랫동안 방치됐던 이곳은 19세기 중반 미국인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알람브라> 란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며 유명세를 탔고, 국가기념물로 선포돼 지금의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주인이 바뀌고 장기간 버려졌던 유적이건만 보존상태는 매우 좋았다. 그라나다의 전설은'이곳을 지은 아랍의 왕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요새 전체에

마법의 주문을 걸어놓았기에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알람브라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성곽인 알카사바(Alcazaba), 나사리에스(Nazaries) 궁전, 카를로스(carlos) 궁전, 아랍 왕들의 여름 궁전인 헤네랄리페(Generalife). 이 중 백미는 나사리에스 궁전이다.

두툼한 성곽을 끼고 돌아 나사리에스 궁전에 들어섰다. 가이드는 이 궁전은 삽과 곡괭이로 지은건축물이라기 보다 예리한 조각칼로 깎아 만든 정교한 세공 작품이라고 했다. 왕을 알현하기 위한 대기실인 메수아르를 지나 코마레스로 들어섰다.

왕의 사적 공간인 이곳엔 직사각형의 기다란 연못이 있는 아라야네스 안뜰이 있다. 궁전의 건물은 그 물에 비쳐 데칼코마니로 아름다움을 복제해낸다. 이 연못은 후에 인도 타지마할 수로의 모델이 됐다고 한다.

아라야네스 안뜰의 남쪽 끝에는 생뚱맞은 건물이 붙어있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가톨릭 왕권이 세운 카를로스 궁전이다. 알람브라의 정중앙에 나사리에스 궁전의 일부를 치고 들어와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그라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카를로스 궁을"알람브라의 가장

흉측한 건물"이라고 혹평했다. 그도 이곳에서 점령군의 오만함을 느꼈을 것이다.

아라야네스 안뜰과 견줄 또 다른 곳은 레오네스 안뜰이다. 유대인이 아랍 왕에게 선물했다는 12마리 사자상이 떠받친 분수대가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복원 때문에 돌사자들이 정원을 떠나 있었다.

이 안뜰 주변의 방들은 이슬람 전통 문양과 아랍어 글귀들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다. 무슬림의 전쟁과 역사, 코란 등의 내용을 적었다는 아랍글자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아랍어의 캘리그래피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지 놀랍다. 석고와 대리석 가루를 섞어 만든 치장벽토의 장식들이 한치도

어긋남 없이 건물 벽면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목한 원통형 공간은 매혹적인 패턴의 정교한 장식으로 가득 차있다. 수천 개가 넘는 작은

칸들은 별자리를 연상케 한다. 눈을 감고 양탄자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고 있을 아랍의 여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카를로스 궁전은 밖에서 보면 정사각형인데 안에 들어가 보면 32개 기둥이 둘러싼 원형마당이 펼쳐진다. 카를로스 왕이 짓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미완성인 건물이다. 그의 후손들은 식민지 확장에 너무 바쁜 나머지 그라나다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알카사바다. 나사리에스 궁을 감싸고 있는 성곽이다. 가장 높은 벨라 탑에 올라서니 그리 크지 않은 종이 매달려 있다.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를 함락한 기념으로 걸어놓은 종이라고 한다.

종탑에서 내려다 본 그라나다의 전경이 황홀하다. 멀리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설산이 아침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요새 옆의 설산만큼이나 반짝이는 하얀 마을은 알바이신(Albayzin)이다. 그라나다 함락후에도 수십여년 회교도 지역으로 남아있던 마을이다. 하얀 벽과 좁은 골목길. 곳곳에 삐죽 솟은

사이프러스의 녹음이 마을에 생동감을 전해준다'. 야외박물관' 같은이곳은알람브라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 있다.

마지막으로 무슬림 왕들의 여름 궁전인 헤네랄리페다. 풀과 나무로 가득한 초록의 공간이다.

곳곳의 시원한 분수대가 맑은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있다. 헤네랄리페의 창 밖으로 내다보면 알람브라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라나다시 위에 둥실 떠오른 것 같은 붉은 빛의 알람브라. 유럽에 찬란한 문명의 큰 획을 그었지만, 유럽의 땅에서 내쳐져야만 했던 이슬람의 깊은

흔적이다. 아스라한 이슬람의 추억이 지금도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 아래 어른거린다.

■ 여행수첩/ 스페인 그라나다

●스페인은 EU회원국으로 우리나라와는 90일 무비자협정이 체결돼 있다. 화폐는 유로를 쓴다. 시차는 우리보다 8시간 늦다. 전기는 220v.

●수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까지 차로 5, 6시간 걸린다. 알람브라는 하루 입장객을 통제하고 있어 사전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 예매(www.alhambra-tickets.es) 입장료는 12유로. 마드리드에서 콘수에그라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중세도시 톨레도와는 1시간 거리다.

그라나다(스페인)=글·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라만차 너른 평원 수놓은 '돈키호테 풍차들'

라만차(La Mancha)의너른 평원을 달렸다. 황량한 누런 땅이 이어졌다. 겨울이라 들판은 휑하니 비었고 적갈색맨흙이 고스란히 바람을 맞고 있었다.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도이땅위로 먼지를 풀썩풀썩 일으키며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갔을 것이다.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찍고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은 드넓은 평원의땅라만차를 지난다. 근대 소설의 효시라 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가 탄생한 곳이다. 라만차엔 서너 개의 풍차마을이 있다.

콘수에그라(Consuegra), 캄포데크립타나(Campo deCriptana), 모타델쿠에르보(Mota del Cuervo) 등이다.

이 중 콘수에그라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풍차 풍광이 가장 멋지다는 소리를 들어서다. 텅빈 들판을 지나 도착한 콘수에그라는 제법 큰 마을이다. 낮은 지붕의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하지만 정작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잘보이지 않는다. 골목과 골목 사이엔 바람만 가득했다. 바람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벽이고 지붕이고 모두 색들이 바랬다.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언덕에 굵은 둥치의 풍차들이 여러대 서 있다.

풍차에 오르기 전 성채 하나를 지났다. 13세기에 지어진 이슬람식 요새다. 모든 풍차의 날개는 덮개가 벗겨져 앙상한 틀만 드러내고 있다. 바람이 불었지만 날개는 돌지 않았다.

풍차를 기사의 적인 거인이라 생각한 돈키호테가 늙은 나귀 로시난테를탄채장창을 치켜들고 돌진했던 바로 그것들이다. 소설 속 돈키호테는 세차게 돌아가는 날개에 휘말려 로시난테와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들판에 나뒹굴고 말았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넓은 라만차 평원. 돈키호테를 스쳤던 바람이 여전히 언덕을 휘휘 돌고 있다. 평원이 바다처럼 넓어서인지 등을 기댄 풍차가 등대처럼느껴진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과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안내하려고서있는 등대 말이다.

너무나 평온한 공간에선까닭일까. 때론 돈키호테처럼 가끔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콘수에그라(스페인)=글·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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