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나니,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 21세기 후손들의 소망을 예견했던가. 화가 임옥상씨의 노송 그림이 담긴 병풍을 배경으로, 임진택(59)씨가 중머리 장단을 타고 헌걸차게 외친다. 24일 오후 4시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펼쳐진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 첫 완창 공개 시연장은 귀명창 150여명이 간단없이 터뜨리는 추임새에 해 저무는 줄 몰랐다.
'청년 역정'을 신호로 2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부 '해방 시대'까지, 모두 3시간 10분(각각 1시간여 소요)이 걸린 '백범 김구' 공개 시연을 통해 판소리는 다시 한번 솟구쳤다. 전주대사습 장원 출신인 왕기석(46), 왕기철(48) 형제 명창에 이어 임진택씨가 이끌고, 고수와 객석은 추임새로 판을 짜 올렸다. 웅변조에서 간신배 목소리까지 뽑아 올리는 소리꾼들의 연기에 "얼쑤" "잘한다" 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 손뼉이 길어지자 어떤 관객은 "박수 칠 대목 아닌데…"라며 지청구를 하기도 했다. 컬컬해진 목을 축이느라 명창들이 물을 들이켜는 시간마저도 판을 기름지게 했다.
이날 공연은 창작판소리열두바탕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전 문화부차관)의 '새로운 판소리 열두 바탕 기획 제작' 사업의 닻을 올리는 자리였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5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인 판소리를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친숙한 인물들을 소리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것. 김구를 비롯해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 전봉준 등 역사적 인물 다섯 바탕, 허준, 홍길동, 장보고, 대장금 등 전설적 인물 네 바탕, 송흥록, 신재효, 진채선, 임방울 등 판소리사의 위인 세 바탕 등 모두 열두 바탕을 각각 100~120분의 소리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발빠른 풍자, 해학, 재담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더늠(애드립)을 적극 유도, 대중적 확산을 꾀한다는 전략이다. 또 매기고 받는 판의 구조에 주목,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소리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일반인들의 귀에 쉬 들어오는 민요조의 단가는 긴 판소리의 백미다. '백범 김구'에서 '백범일지'에 근거한 '열사가'가 등장하는 것처럼, 세종대왕의 경우는 '세계문자가', 대장금에는 '여성 인물가', 허준에는 '명의가' 등이 첨부된다. 총 제작비는 30억원.
이번에 판본을 쓴 소리꾼이자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 추진위원장 겸 예술감독인 임진택씨는 "'백범일지'야말로 한글과 한문, 산문과 운문이 막힘없이 혼용돼 있는 이야기체 문학의 정수"라며 "한일병합 100년, 한국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올해 갖게 된 이 자리는 지난해 김구 선생 서거 60주년에 맞춰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덜게 했다"고 말했다. 이 판소리는 향후 실제 무대에 대비, 2~5시간의 공연 시간을 충족할 수 있도록 계속 버전업될 예정이라고 추진위 측은 밝혔다. 천안시청 봉서홀(3월 1일), 서울 정동극장(4월 12일), 백범김구기념관(6월 26일) 등에서 앞으로 벌어질 판은 변용과 축적의 현장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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