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에 투자는 멀리 보고…" LCD액정 연구도 100년전에 시작
"100년 가까이 '쓸데 없는(Uberflussing) 유리'라는 조롱도 받았죠.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 LCD용 액정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연구 개발에 힘쓴 기술력의 승리입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헤센 주 다름슈타트. 인구 10만명 남짓한 이 도시에 있는 세계적 화학ㆍ제약 회사 머크에서 만난 액정사업부 로만 마이쉬 박사는 LCD용 액정 개발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머크가 액정 연구를 시작한 건 지금부터 100년도 더 지난 1904년. 액정이 디스플레이용 소재로 쓰이기 시작한 게 1970년대, 대형 LCD TV에서부터 핸드폰, LCD 모니터 및 노트북까지 쓰이며 수 천 억 원대 시장을 형성한 건 1990년대이다. 90년 넘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던 액정 연구에 적지 않은 연구비를 쏟아 부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신·성장의 원동력' 판단 해마다 수백명 교육생 뽑아해외연수에 대학교육도… 수료후 90% 정식 직원으로"또 다른 100년 앞선 신기술 만드는 중… 도전은 계속"
342년의 역사를 지닌 머크는 그룹 전체 지분의 70%를 120여 명의 머크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는데, 머크 일가라 해도 소유 주식의 3분의 1 이상을 외부에 팔 수 없고 패밀리들끼리만 양도 할 수 있다. 머크 가문은 대형 인수합병(M&A) 등 큰 그림만 그릴 뿐,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 소유, 경영이 확실히 나눠져 있기 때문에 경영진은 당장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멀리 보고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세계 모든 기업이 금융 위기 여파에 움츠려 든 지난해에도 머크는 12억 유로 이상의 R&D 비용을 투입했다.
이런 머크의 기술력의 원동력은 바로 뛰어난 기술 인력에 있다는 게 대외 홍보 담당 니나 디어가르트씨의 설명이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R&D에만 힘을 쏟을 수 있는 것처럼 회사는 미래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 기술 인력의 훈련과 교육에 있어서도 긴 안목으로 아낌 없이 투자하고 있다.
머크는 초ㆍ중ㆍ고 정규교육을 마친 이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수 백 명의 직업 교육생을 뽑고 있다. 교육생은 화학, 생물, 물리 등 과학계통을 비롯해 전기, 산업기기, 안전 관리 등 기술계통 등 18개 직종에서 2∼3년 6개월에 걸쳐 실습과 이론을 함께 배운다. 3분의 2는 실험실, 생산 공장, 수리 센터 등 현장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나머지는 기초, 고급으로 나눠진 실무의 이론을 익힌다. 매달 650유로(약 100만원)의 급료도 받는다.
특히 교육을 마치면 10명 중 9명은 머크의 정식 직원으로 계속 일을 하고 있다. 회사로서는 미래 핵심 인력의 수준을 미리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고 교육생은 미래 직장에서 미리 일하면서 기술과 이론을 배울 수 있다. 교육생에 뽑히는 것 자체가 세계 최고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교육생 선발 경쟁률부터가 상당히 높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
마이쉬 박사는 "2003년부터는 회사에서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인원을 뽑고 있다"며 "해 마다 교육생 수가 늘어 지난해 531명의 교육생을 뽑았다"고 말했다.
머크는 이들 교육생들에게 해외 연수의 기회도 주고 있다. 해외 지사, 해외 제휴 대학 등에서 최대 3개월까지 다양한 업무를 접하도록 한 것.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약하는 머크의 인재들에게 세계 시장의 변화 흐름을 접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아울러 필요한 경우 다른 기업, 연구소와도 손을 잡고 있다. 머크는 제약 관련 진단의약품 회사 '비오테스트', '폴 에를리히 연구소'에 교육생의 교육을 맡기고 외부 기술 교육 전문 교육 기관에도 교육생을 보내기도 한다. 또 직원 스스로가 좀 더 수준 높은 이론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따로 밟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장 실습과 이론 교육을 통해 탄탄한 실력을 갖춘 미래 기술 인력들이 차근차근 성장하고 이들이 또 다른 100년을 앞서는 새 기술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게 머크의 성공 비결이라고 회사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1970년대 액정이 디스플레이 용으로 쓰이자 로슈, 바이엘 등 후발 주자들이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상용화에 실패했다.
회사 관계자는 "태양전지용 유기 물질과 오스람, 도요타고세이 등이 선점하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OLED용 형광체 시장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며 "이 도전의 주역은 바로 기술 인력"이라고 강조했다.
다름슈타트(독일)=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젊은 중소기업' DMF社/ 기술자 대부분 20대…27살의 '마이스터'가 공장장
독일 중부 튀링겐 주 노흐라시 외곽 산업단지 내에 있는 DMF.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다양한 기계 제품의 금형과 부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올해로 회사 설립 20년을 맞는 중소기업이다. 독일과 유럽의 자동차 회사들을 비롯해 태양광 기업, 각종 설비회사 들을 상대로 활발한 수출을 진행하고 있다.
루쯔 매르커 대표는 "무게 6톤에 최대 압력 1,000톤까지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며 "2008년에는 기술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ISO 9001 인증도 얻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특이하게 자체 디자인 센터까지 갖출 정도로 탄탄한 이 회사에는 53명의 기술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놀라운 건 이 공장의 공장장이 20대라는 것. 주인공은 우르 티엘레(27)씨. 20대 중반의 이 젊은이는 현장 직원을 이끌며 생산 전반의 시간표를 짜고 직원들을 배치하는 등 진두지휘에 직접 나서고 있다. 매르커 대표는 이에 대해 "그는 '마이스터(Meister)'"라면서 "리더십도 좋아 많지 않은 나이에도 현장을 잘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티엘레씨는 3년 전인 2007년, 스물 넷의 나이에 기능인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마이스터에 올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3년 가까이 실습생으로 회사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이후 게젤레로 일하며 마이스터가 되기 위해 준비했다. 티엘레씨는 "일하면서 야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마이스터 준비 수업을 듣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내 기술력을 좀 더 많은 곳에 써보고 싶었고 직접 생산 현장을 이끌어 보겠다는 큰 목표를 정했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3년. 티엘레씨는 기계 설비 관련 마이스터가 됐다. 대학을 가는 대신 10대 때 일찍 자신의 갈 길을 정하고 꾸준히 준비했고 그 결과 이제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게 그의 설명.
티엘레씨를 비롯해 이 공장 기술자들의 대다수는 20대이다. 독일 전역에 300만개가 넘는 중소기업이 있고, 그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은 멀리 갈 필요 없이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서 일하면서 공부도 하는 것이다. 일부러 먼 곳의 큰 기업에 가는 것보다 실속 있는 중소기업을 선호하는 독일의 실용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크쿠스 나우만(18)씨도 그 중 하나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DMF에 들어온 그는 티엘레씨로부터 여러 기술을 배우면서 매주 한 두 차례 직업학교에서 이론 수업도 받고 있다. 나우만씨는 "꼭 큰 회사가 아니더라도 내실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게 더 많은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집도 여기서 멀지 않아 부모님도 좋아하신다"고 전했다. 그 역시 티엘레씨처럼 마이스터까지 오르는 게 목표라며 웃었다.
헤르베르트 슈티츠 튀링겐주 개발공사 이사는 "기술 강국 독일의 버팀목은 바로 중소기업"이라며 "젊은 세대들이 중소기업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밝다"고 강조했다.
노흐라(독일)=글ㆍ사진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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