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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5> 식민의 바다, 침략 전초기지 어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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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5> 식민의 바다, 침략 전초기지 어청도

입력
2010.03.0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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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다롄과 일본 오사카 중간에 위치… 일제, 대륙침략 해양기지로

약탈과 살육은 배를 타고 건너왔다. 호국용(護國龍)이 되고자 자신의 시신을 바다에 묻어라 했다는 신라 문무왕(626~681)의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를 에운 바다는 일본 열도에서 발진한 침략자들의 루트였다. 20세기 강점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책은 흔히 내륙의 오욕과 상처만 기록하지만 바다는 육지보다 오랜 수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흔적은 지난 100년의 밀물과 썰물에도 씻기지 않고 남아 침략의 역사를 증언한다.

오전 9시, 전북 군산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어청도(於靑島)로 가는 121톤급 쾌속선이 떴다. 앞바다의 물결은 잔잔했다. 그러나 출항한 지 20여분 만에 만난 격랑에 배는 이물을 돌려야 했다. 높이 4m의 파도를 먹어 한 차례 엔진이 꺼지기까지 한 배는 간신히 회항했다. 지금 시속 16노트의 쾌속선으로 2시간 40분 걸리는 이런 험한 뱃길 끝에, 한 세기 전 일본이 침략의 전초기지를 세웠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이튿날 다시 뜬 배로 어청도에 도착했다. 늦겨울의 섬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한산했다. 지금은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 하지만 본래는 충남 오천군에 딸린 섬이었다. 일본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19세기 말에는 인천부에 속했다. 90여 가구 150여명의 주소지라는데, 주민들은 대부분 군산에 따로 집을 두고 생활한다. 그들은 조업과 낚시 관광이 시작돼야 돌아온다. 이장 김완호씨는 "설 연휴 동안 군인들 빼고 섬에는 단 13명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0년 전 이곳은 은성한 항구였다. 일제의 통감부가 1908년 발행한 '한국수산지'는 어청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 65호 297인이 살고 있으며 일본인 40여호 200여인이 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하며 일본인의 직업은 어업 26호, 그 외에 교육자 요릿집 목욕탕 약국 과자점 두부제조업 등이 있다." 어청도 개발위원장 전명진씨는 "구한말부터 해방 때까진 일본 청주를 만드는 술도가와 일본식 유곽까지 있었다고 들었다"고 선조들의 기억을 전했다.

이곳에 앞다퉈 건설된 근대적 기관과 시설물의 기록도 낙도가 돼버린 지금의 위상과는 판이하다. 우편소(1903년), 후에 소학교가 된 일본인회립(1909년), 어업조합(1917년) 등이 서해안 전역에서 최초이거나 두세 번째로 건설됐다. 1912년 세워진 등대도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서해안에 불을 밝힌 것이다. 군산에서 72㎞, 당시의 배로 20시간이 넘게 걸린 어청도에 일본이 일찍 눈독을 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동아시아 지도를 펴보면 이유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어청도는 중국 랴오둥반도와 일본 열도 한가운데 위치한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다롄을 접수하는데, 오사카와 다롄 사이를 운항하는 배의 중간 기착지로 어청도가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의 해군선뿐 아니라 화물선, 여객선들은 긴 뱃길 중간에 이곳에 들러 본국에 전보를 보내고 물자를 보급받았다. 당연히 일본의 함대도 주둔했다.

주민 유태원(73)씨의 증언이다. "7살 땐가, 8살 땐가… 그때는 중국에서 옥수수 같은 군수물자를 싣고 온 짱크선(정크선)이 들렀다 가곤 했는데 해방 직전 미군이 그걸 폭격해 항구가 불바다였어. 그래서 옆 섬에 피난 가 있는 동안 해방이 된 거야. 보름 정도 더 있다가 돌아왔는데 학교(심상소학교)에 가득하던 벚나무가 다 베어지고 없는 거야. 일본인 교장이 분을 못 이기고 닛뽄도(일본도)로 다 잘라버렸다고 그러데."

고깃배들이 묶인 방파제로 나갔다. 콘크리트 블록을 쌓아 만든 여느 방파제와 달리 어청도의 방파제는 자연석으로 축조돼 있다. 일본인들이 1933~34년 쌓은 것이다. 장유선(85)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산에서 남포(다이너마이트) 터뜨려 갖고 돌을 캐서 리어카에 싣고 날랐지. 일본 사람들이 섬창(축대)은 참 잘 쌓았어. 우리 어머니도 그 일 해서 돈을 벌었는데, 일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어. 일본인 십장이 망원경으로 일하는 걸 감시했어."

지금 천주교 공소가 들어선 봉긋한 자리는 본래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던 터다. 거기 오르자 100년 전 일본의 대륙 침략 교두보였던 마을과 포구,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썰물로 바다가 물러나자 시멘트 포도 밑의 자연석 방파제가 70여년 전 군국주의의 기억을 드러냈다. 중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의 함대가 둔진했던 포구엔 한국 해군의 경비정 두 척이 닻을 내리고 있다. 쇠락해가는 포구의 풍경 너머로, 식민의 기억도 차츰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어청도=유상호 기자 shy@hk.co.kr

■ 등대는 日대륙진출 야욕 드러낸 '제국의 불빛'

몇 해 전부터 '○○도 등대 100주년 기념식'이라는 행사가 한반도 삼면의 바다에서 돌아가며 열리고 있다. 팔미도를 시작으로 월미도, 백암, 북장사서(이상 1903년), 부도(1904년), 제뢰, 거문도(이상 1905년), 영도, 우도, 울기(이상 1906년), 호미곶, 소청도(이상 1908년) 등이다. 1910년대에 건설된 등대들도 줄지어 100주년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바다의 중요한 등대들은 대부분 1920년 이전에 건설이 마무리된 셈이다.

육지로 치면 간선도로에 해당하는 뱃길마다 이 시기에 등대가 세워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근대사 연표를 들춰보면 해답이 금방 나온다. 일본은 1891년 지금의 경기만 풍도 근처에서 청나라와 해전을 벌였는데, 한반도 연안에 등대가 없어서 함선 통항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청일전쟁(1894~95)에 승리한 뒤 일본이 조선에 요구한 사항 중엔 '등대 건설에 협조하라'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의 등대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제국의 불빛'으로 점등됐다.

등대 건설은 1902년 시작됐지만 일본은 이미 1892년부터 조선의 수로를 장악할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등대 건축 전문가인 이시바시 아야히코는 그 해 한국 연안에 대한 측량을 마쳤다. 이후 일본은 여러 차례 대한제국에 등대 건설에 드는 비용을 요구했고, 1901년 관세 수입으로 비용을 대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본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비용을 반식민 상태의 대한제국이 댄 셈이다. 침략과 공출의 혈맥으로서 육지에 철도가 건설된 과정과 닮았다.

어청도=유상호기자 shy@hk.co.kr

■ "한반도의 운명은 바다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시모노세키가 속한 일본 야마구치현 북쪽 바닷가에 '하기(萩)'란 마을이 있다. 너무도 작은 동네라 걸어서 구경할 만하다. 그 작은 동네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하세가와 요시미치,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명성황후 시해범들인 이노우에, 미우라 공사, 러일전쟁의 주역인 노기 원수, 일본 육군의 아버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고향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으며, 한반도 침략의 선봉장이었다. 한반도를 먹겠다는 정한론이 싹튼 본향은 변방의 바닷가였다.

우리는 습관처럼 '일제 36년'이라 하는데 바다에서의 침략은 이미 구한말부터 시작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한 운양호가 1876년 제물포에 나타나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해 한반도는 강제로 개항됐다. 해양세력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요코하마를 연 일본이 여기서 배운 수법을 한국에 적용한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또한 바다전쟁이었다. 청의 북양함대가 경기도 풍도해전에서 완패했으며, 러시아 발틱함대는 한일해협부터 독도에 이르는 동해에서 침몰했다. 특히 러일전쟁의 승리는 곧바로 통감부 설치로 귀결되었다. 1905년에 비밀리에 벌어진 시마네현의 독도 병합도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바다에서의 수탈과 지배는 육지와 많이 달랐다. 어업과 어민을 천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일본은 어민과 자본을 투입해 한반도 주요 어장을 손쉽게 장악했다. 어업령 등 다양한 법적 장치로 통제하여 일본인의 이익을 보장했다. 통조림·김·건어물 등을 비롯하여 엄청난 수산물도 공출당했다. 가령 1930년대에 세계 1위를 차지하던 정어리잡이는 종의 멸종을 가져와 1940년대 초반에는 이미 정어리가 사라진다. 일제가 정어리기름을 기반으로 화학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로 무차별 어획을 감행한 결과였다.

19~20세기에 한반도에 치명타를 가한 열강은 해양세력이었다.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각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시각을 바깥으로 돌려 바다 건너 반대편에서 바라본다면 한반도 역사의 물마루도 훨씬 명료하게 보일 것이다. 현재도 대륙세력인 중국과 러시아를 해양세력 미국과 일본이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은 섬나라다. 분단된 남한 역시 섬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해양통합정책을 국가적 아젠다로 관장할 위원회 하나 만들어놓지 않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해양수산부마저 없애버렸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으면서, 한국인의 고질병인 해양경시정책의 후과를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강현ㆍ제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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