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있는 작업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온 젊은 작가 두 명의 개인전이 나란히 열린다. 알파벳이나 한글 자음을 컴퓨터 자판으로 치면 그에 해당하는 그림 단위가 뜨는 '딩뱃(Dingbat) 폰트'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박미나(37)씨,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소비사회를 꼬집는 설치 작품을 선보이는 자동차 디자이너 출신 작가 잭슨 홍(39)씨. 지난해 협업 작품으로 공동 전시를 열기도 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각각의 작품세계를 뚜렷이 드러냈다.
■ 박미나 'BCGKMRY' 전
3원색 덧입힌 블랙 회화 첫선…숫자 딩뱃 폰트 캔버스에 옮겨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본관 전시장은 온통 선명한 원색과 뜻모를 기호의 조합으로 가득하다. 암호 같은 전시 제목의 뜻을 알고 보면 전시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BCGKMRY'는 빛의 3원색인 'RGB'(빨강, 녹색, 파랑)와 인쇄의 기본 색상인 'CMYK'(청록, 자홍, 노랑, 검정)를 알파벳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으로, 이번 전시가 색에 주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박씨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BK(블랙) 회화' 시리즈는 11가지 크기의 동그라미가 있는 자를 이용해 노랑, 빨강, 녹색, 파랑색을 반복해서 덧입혀 검정색을 만든 작품이다. 박씨는 "미술 선생님들로부터 원색을 섞어 검정을 만들어야 색이 풍요로워진다고 배우지 않나. 회화와 색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희한한 것은 같은 방식으로 6점을 작업했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검정색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각기 다른 회사의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딩뱃 회화'의 경우 문자를 모티프로 삼은 예전 작업과 달리 이번에는 숫자를 입력했을 때 나오는 딩뱃 폰트들을 하나의 캔버스에 옮겨 담았다. '19988888'이라는 작품을 보면 '8'에 해당하는 다람쥐 이미지가 색을 달리하며 제목 속 숫자만큼 반복해서 나타난다. "원색을 겹치는 게 아니라 나란히 배열한 것일 뿐 '블랙 회화'와 같은 맥락의 작업"이라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전시장 2층은 박씨가 1999년부터 계속해온 '색칠공부 드로잉' 200점으로 꾸몄다. 어린이용 색칠공부 밑그림에 스티커를 붙이거나 색을 칠해 새로운 의미를 더한 작품들이다. 3일부터 4월 4일까지. (02)3210-9818
■ 잭슨 홍 '엑토플라즈마' 전
펜치 등 일상 사물을 박제로… 불안정한 현대사회 좌절 담아
야구배트, 숟가락, 변기 등 일상 용품들을 유리 상자 안에 넣어 상식을 뒤집었던 잭슨 홍씨. 청담동 갤러리2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일상 도구들을 아예 박제로 만들어 벽에 걸었다. ABS 플라스틱으로 물뿌리개, 펜치, 변기가 막혔을 때 쓰는 공기압축기 등을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만든 뒤 곤충 채집 때 쓰는 핀으로 고정시켰다. 떨리는 것처럼 만들어진 공기압축기의 손잡이와 불타는 모양을 하고 있는 펜치 등 박제된 도구들은 조금씩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지만, 물론 실제 사용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홍씨는 이를 "불안정한 세상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뜻대로,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잖아요. 그런 좌절감으로 인해 일상 사물들에서 헛것이 보이는 거죠. 모두 손으로 다루는 도구들이지만 그 기능은 죽어버린 셈이에요."
선박이 조난당했을 때 거는 깃발 신호, 유럽의 휘발유 운반 차량에 붙은 기호, 그리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 국가 로디지아의 군대 마크 등을 옮긴 평면 작업들도 불안함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잘 먹고 열심히 일하라'는 글귀가 적힌 아침식사용 시리얼 상자가 마치 건축물처럼 우뚝 서서 비꼬는 듯 현대인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닭벼슬 같은 장식이 달린, 전혀 안전해 보이지 않는 플라스틱 안전모에는 '순진하고 낙관적인'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홍씨는 이번 전시에 대해 "늘 어떤 결론을 내리고 세상을 교정하고자 했던 예전과 달리 모호한 채로 내버려둔 채 상황을 즐기고자 했다"고 말했다. 27일까지. (02)3448-2112
글ㆍ사진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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