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도시에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 아직 신호등이 설치되지 않아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을 내보내 수신호로 교통지도를 했다. 몇몇 차량은 수신호에 따라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무원을 관리ㆍ감독하는 상급자가 뒤따라와 수신호가 잘못됐으니 온 길을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새 도로는 카풀 차량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과차량 중에는 2인이 탄 차량이 더러 있었고, 교통지도 공무원은 2인 이상이 타면 카풀 차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풀 차량의 정의에 대해 논란이 일자 상급 관청은 4명 이상이 타야 카풀이라는 ‘카풀 차량에 관한 규정’을 뒤늦게 만들어 하달했다. 이미 교차로를 통과해 목적지에 도착한 차량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견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 예는 지난 며칠 사이 자율고 입시와 관련하여 벌어진 사태와 매우 흡사하다. 현 정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자율고의 핵심은 획일적 입시로부터 벗어나 일정 정도 학생선발권을 고교에 준 것이다. 자율고의 전형요강에서 문제가 된 특별전형의 사회적 배려대상자 중에는 ‘기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 중 중학교 학교장이 추천한 자’가 들어 있다. 교육당국은 이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일선 자율고는 중학교장 추천서에 질병 사고 실직(사업 실패 등), 수입 감소(사업 부진), 혜택 소멸(기초수급 등), 기타 항목에 대한 난을 만들어 배포했다. 지원자는 해당 항목을 선택하고 중학교장은 이를 확인해 추천하게 돼 있었다.
일부 자율고 합격자 중에는 이 제도를 악용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허위로 증빙서류를 만들어 특별전형에 합격한 학생에 대한 입학취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교육행정 당국이 뒤늦게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기준을 일률적으로 ‘국민건강보험료 일정액 이하 납부자’로 정해 일선 자율고에 하달하고, 그에 미치지 않는 학생들의 입학을 취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원적 잘못은 교육행정 당국에 있다.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정의를 처음부터 명확히 했더라면 이런 혼란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료 납부액을 기준으로 대상자를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이 기준은 내년부터 시행하면 된다. 자율고 전형요강과 중학교의 지도에 따라 지원해 합격한 학생과 학부모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교육당국이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아 생긴 혼란의 책임을 강제로 떠안는 것은 부당하다.
1월 1일로 해는 바뀌지만 학생들에게 새해는 3월이라고 할 수 있다. 2월 말은 새 학년, 특히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적응할까 약간은 긴장하는 그런 때가 아닌가? 1기 자율고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하다. 일부 학부모는 학교 근처로 이사까지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입학을 사나흘 앞두고 입학을 취소하고 재배정한다니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행정법에는 이른바 ‘신뢰보호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행정청이 어떤 행정행위를 하고, 국민이 이를 믿고 따른 경우 선행 행정행위에 흠이 있더라도 그 행정행위를 함부로 철회하거나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행정청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함부로 거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신호를 잘못했다면 그 교통지도 공무원을 징계하거나 차제에 수신호체계를 바꿀 요량이라면 다음부터 적용하면 되는 것이지, 교통지도 공무원의 수신호에 따라 이미 집에 들어간 사람에게 수신호를 잘못했으니 출발지로 돌아가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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