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심심미묘버업, 백천만겁난조우우, 야금문견득수지이…"
천수경을 독송하는 음성이 마디지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동탁하니 깎은 머리 밑에 푸른 눈동자. 먼 이국에서 온 젊은 스님이다. 법명이라도 묻고 싶은데 송곳 같은 표정이 허튼 지분거림을 허락지 않았다. 한국어의 억양은 아직 서툴지만 화두를 꽉 깨문 수행자의 기세는 넓은 도량을 채우고 남음이 있었다.
충남 계룡시에 있는 국제선원 무상사가 동안거 해제를 사흘 앞둔 25일 선원을 언론에 개방했다. 2000년 창건된 이 절은 국적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수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열려진 공간. 석 달 안거가 막바지에 이른 이날엔 15개국 출신 33명의 스님과 재가자들이 계룡산을 적시는 빗소리 속에서 코끝을 내려보고 앉아 있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음식을 주고, 도움을 바라는 이를 돕는 것이지요." 무상사 조실 대봉(60ㆍ속명 로렌스 시컬) 스님은 결제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했다. 숭산(1927~2004) 스님을 은사로 1984년 출가 이후 한 차례도 안거를 거른 적이 없는 선승이 몸으로 체득한 진리였다. 그는 어떤 질문에든 "Who are you?"(너는 누구냐)라고 되묻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날 법문의 핵심도 "내 마음 속에 'I'(나)라는 집착이 사라지면, 결국 결제와 해제도 둘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모른다'(I don't know)는 자각에서 더 나아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I'를 내려놓을 때, 태어나지도 죽지도 오지도 가지도 않는 '오직 청정한 한 물건', 그것의 참된 주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상사의 안거는 각국에서 온 스님과 재가 불자는 물론, 다른 종교를 가진 성직자와 일반인들까지 참여하기에 쓰이는 말은 영어다. 좌선은 'Sitting Zen', 가행정진은 'Intensive Week'로 표현하는 식. 조실 스님의 호칭도 'Zen Master'다. 수행을 점검하는 선문답(Interview)은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이뤄진다. 염화미소의 법거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주지 대진 스님은 "무상사의 선문답은 선 수행과 일상이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질랜드에서 온 스티븐 데본포트(41)씨는 '날마다 어찌 밥을 먹는가'가 자신의 화두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공안(公案)을 붙들고 석 달째 버둥거리고(struggle) 있다"면서도 평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올해 동안거가 네 번째 안거라는 그는 "마음을 맑게 해주고, 어려운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안거 참가 이유를 말했다. 체코에서 온 베라 흐루쇼바(48)씨는 "진정한 수행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5년 전부터 무상사를 찾고 있다"며 "유럽에서도 명상은 할 수 있지만 이곳 같은 분위기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오후 1시 30분, 입선(入禪) 시각을 알리는 죽비가 울렸다. 서로 등을 맞대고 면벽한 이들이 다시 저마다의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선방 문지방을 조용히 넘어나오며 조계종에서 나눠준 자료를 펴봤다. 종정 법전 스님이 내린 동안거 해제 법어가 실려 있었다. "진불엄위(眞不揜僞)하고 곡불장직(曲不藏直)이라." 참은 거짓을 가리지 않고, 굽음은 곧음을 감추지 못한다.
무상사=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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