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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누가 늙기를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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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누가 늙기를 두려워하랴

입력
2010.03.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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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걸렸는지 새로 산 옷이 뜯어졌다. 돋보기를 끼고 서툰 솜씨로 바느질을 하는데 조그만 날벌레가 눈앞을 어지럽힌다. 바느질을 멈춘 채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녀석을 좇다가 뒤늦게 실소하고 말았다. 노화와 함께 찾아온 상상의 벌레를 두고 헛손질을 한 것이다.

눈앞에 먼지나 벌레 같은 게 보이는 비문증(飛蚊症)은 나이든 이들에겐 드물지 않은 증세다. 두어 해 전부터 내 눈에도 먼지 같은 것이 어른거렸는데, 새해 들어 이 먼지에 벌레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나이가 드니 주름살도 늘고 눈의 벌레도 늘고 아픈 데도 늘고 시름도 는다. 하기야 나이 들어 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는 것도 있다. 근력이 줄고 총기가 줄고 식욕이 줄고 하고픈 것도 준다. 그러나 늘고 주는 차이뿐, 돌아보면 다 쓸쓸하다. 노화를 핑계 삼아 무위하게 보내는 노년이나, 노화를 부인하며 노욕을 불태우는 노년이나 속절없기는 매한가지. 그러니 늙는 것은 그저 쓸쓸한 일,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미술관을 갔다가 이것이 섣부른 비관이었음을 깨달았다. 전시장에 걸린 가로 1m, 세로 2m에 육박하는 커다란 드로잉들을 그린 것은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세계적인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그녀가 97세부터 99세까지 3년 동안 작업한 것들인데, 강렬한 색깔이며 자유로운 상상력이 도무지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나는 아직도 성장 중!!!> 이라는 꽃 그림이었다. 꽃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에서 새로 봄꽃이 돋아나듯이, 늙음이 젊음을 낳고 젊음이 늙음을 맞이하는 자연의 섭리를 담백하게 표현한 작품인데, 더욱 가슴을 울린 것은 98세에도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겸손한 자신감이었다. 아마도 그런 겸손과 자부심이 있기에 100세가 된 지금도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혹자는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고, 늙으면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줄기 마련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2,000여 년 전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가 말했듯이, 노년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노화가 아니라 개성이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노인은 으레 인색하고 무기력하고 보수적이라는 통념을 비판하면서 그 반증으로 그리스의 7대 현인 솔론을 예로 든다.

솔론은 집정관 시절, 빚 때문에 노예가 된 빈민층을 구제하기 위해서 빈민층의 채무를 가볍게 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그 뒤 권력을 잡은 피시스트라토스가 이 법을 일부 폐기하고 독재를 시도하자 그에 맞서 격렬히 싸웠다. 키케로는 당시 솔론이 뭘 믿고 그렇게 반대하느냐는 피시스트라토스에게 "노년에 의지하여"라고 대답했다면서, 삶에 집착하지 않는 노인이야말로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키케로는 이 책을 쓴 1년 뒤, 안토니우스의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 당했으니 자신의 말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노인인구가 전체의 10%를 넘고 기대수명이 여든을 넘는 시대다. 전보다 더 길고 더 건강해진 노년을 살게 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걸 복으로 여기는 시선은 드물다. 오히려 노인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만 날로 커진다.

야박한 인심을 탓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길어진 노년을 욕이 아닌 복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듯싶다. 좌우를 나누며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대신, 겸허한 자부심으로 헌신하는 노년들이 늘어난다면 누가 감히 늙기를 두려워하랴.

김이경 소설가ㆍ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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