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백미옥(59)씨의 컬러풀한 그림에서는 왠지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캔버스 대신 광목 천을 사용하고, 오래된 절의 퇴색한 단청과 무속신앙의 오방색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업 방식도 독특하다. 그는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몇 개월 동안 숙성시킨 뒤 사용한다. "색을 그대로 뱉어내는 캔버스와 달리 광목은 물감이 스며들면서 색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게 백씨의 설명이다. 그런 후 가는 붓으로 색깔을 바꿔가며 30~40번씩 드로잉을 반복해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노동집약적 작업을 거친 깊이감 있는 화면에서는 은은하게 꽃의 형상들이 드러난다. 오래된 연못 속에서 피는 능화라는 하얀 꽃이다. "물 위로는 딱 한 송이의 작은 꽃을 피우지만, 물 아래는 단단한 뿌리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서 에너지의 근원과 생명의 뿌리, 영원성을 느꼈습니다."
서울 평창동 키미아트에서 4년 만에 여는 개인전 '능혜'에서 그는 능화를 소재로 한 그림과 같은 방법으로 작업한 나무, 산 시리즈와 설치 작품도 내놓았다. 푸른 빛으로 물들인 광목 두루마리들을 공간에 걸거나 펼쳐놓았고, 1년에 걸쳐 자신의 얼굴을 본떠 만든 색색의 마스크 작품도 걸었다. 2002년 뉴욕 개인전 때 처음 시도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업이다.
수많은 붓질과 시간이 응축된 그림은 작가의 삶과도 포개진다. 백씨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33세에 미술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작가다. 39세에 미대 대학원에 진학하고, 49세에 미국 유학을 떠났을 만큼 예술의 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떠난 유학길에서 뉴욕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발탁돼 미국과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전시는 23일까지. (02)394-6411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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