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얼음을 지치며 마냥 신기해하던 꼬마는 14년 뒤 '올림픽 피겨퀸'이 됐다. 전세계인의 경탄을 자아내는 한국의 자랑으로 우뚝 선 김연아(20ㆍ고려대). 500g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마음 편히 웃는 날만큼이나 남몰래 눈물 훔치는 날도 많았다. 처음 스케이트와 만난 이후 겪어온 환희와 아픔의 순간들 하나하나가 피겨퀸의 올림픽 금메달을 주조했다.
6세 때 찾아온 세렌디피티(serendipity)
김연아는 자전 에세이 <김연아의 7분 드라마> 에서 피겨와의 첫 만남을 '세렌디피티'라고 했다. 운수 좋은 뜻밖의 발견이라는 뜻. 여섯 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과천실내아이스링크를 찾은 김연아는 피겨를 배우는 초등학생 언니들을 보고 뭔지 모를 설렘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부모를 졸라 강습반에 등록하고부터는 콧노래의 연속. 김연아의>
피겨선수의 꿈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키웠다.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여자싱글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미국)의 연기를 비디오로 반복해 보면서부터. 12년 전 김연아는 12년 뒤 '피겨퀸'을 마음 한 구석에 품었다.
내 인생의 첫 트리플
남보다 걸음도 빨리 뗐고, 강습반에 등록하기 무섭게 선수 과정을 제의 받았던 김연아. 미셸 콴을 보며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3회전 점프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떠난 미국 콜로라도 전지훈련에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와이어를 달고 지겨우리만치 연습하다가 저도 모르게 성공한 트리플 토루프(왼발 토 픽을 찍어 점프해 3회전). 줄넘기 2단 뛰기 연속 70번의 단내 나도록 지독스러운 훈련이 준 열매였다. 김연아는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교과서 별명 뒤엔 열한 살 소녀의 독기가
한 번 열린 새 세상은 닫힐 줄을 몰랐다. 김연아는 토루프에 이어 살코, 러츠, 플립, 루프 순서로 차곡차곡 트리플 점프를 '마스터'해 나갔다. 훗날 '교과서' 별명을 붙여준 트리플 러츠는 사실 성공하는 데 가장 애를 먹었던 점프였다. 머리로는 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 '오늘 성공 못하면 집에 안 간다'는 초등학생의 독기가 열쇠였다. 수십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된 트리플 러츠. 큰 산을 넘자 트리플 플립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완성됐다.
첫 국제대회에서 일을 내다
2002년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 트로피대회. 김연아가 출전하는 첫 국제대회였다. 만 13세 미만 부문에 출전, '캉캉(쇼트프로그램)'과 '동물의 사육제(프리스케이팅)'에 맞춰 연기한 뒤 얻은 성적은 1위. 트리플 점프를 자유자재로 뛰는 선수는 김연아 외에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김연아는 "어릴 때 스케이팅이 무작정 재미있고 좋았다면, (국제대회 경험 이후)잘하고 싶었다. 스케이트를 더 잘 타서 더 큰 세상에서 '스케이터'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포기의 순간에 캐낸 희망, 그리고 국가대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반복되는 쳇바퀴 생활. 사춘기의 김연아도 지쳤다. 첫 국제대회 후 처음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발목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까지 겹쳤고, 동계체전을 끝으로 링크를 떠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모와도 얘기가 됐고, 코치에게도 통보한 상황. 마음을 비우고 출전한 동계체전에서 또 1위를 했다. 5개의 트리플 점프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만두기엔 눈앞에 펼쳐진 빛이 너무 눈부셨다. 그렇게 일어선 김연아는 중학교에 입학한 2003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훈련에 다시 몸을 내던졌다.
주니어 1위, 피겨요정의 화려한 탄생
2005년 처음 나선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위에 오른 김연아는 1년 만에 준우승 아쉬움을 던져버렸다. 2006년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시상대 맨 꼭대기에 선 것. 선배의 헐렁한 스케이트를 빌려 신고 나가 177.54점을 받았다. 지난 2개 대회에서 아사다 마오(일본)에 밀려 연속 2위에 자리한 김연아는 아사다(153.35점)를 20점차 이상 멀찍이 따돌렸다. "또다시 지고 싶지는 않았다"는 김연아의 말처럼 라이벌 의식은 이때부터 싹텄다.
시니어 데뷔전, 연착륙에 성공하다
"주니어에서 반짝하다 사라져 버리는 그저 그런 선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는 김연아. 시니어 데뷔전은 '피겨 불모지'였던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62.68점으로 쇼트프로그램 1위에 오른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 후반부 실수로 고전했으나 105.80점(4위)으로 선방, 합계 168.48점으로 3위에 올랐다. 김연아는 태어나서 처음 팬들에 둘러싸여 사인을 하며 '이게 진짜 대회구나'라고 절감했다.
3위, 또 3위, 그리?마침내 월드챔피언
첫 세계선수권대회인 2007년 3월 도쿄대회에서 김연아는 3위에 올랐다. 쇼트프로그램에서 71.95점으로 역대 최고점을 경신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극심한 허리 통증을 견뎌내고 올린 최선의 결과. 이듬해 3월 두 번째 세계선수권대회인 스웨덴 예테보리대회에서는 고관절 통증이 발목을 잡았다. 쇼트프로그램 점수는 59.85점(5위). 시니어 데뷔 후 두 번째로 낮은 점수였다. 프리스케이팅에서 123.38점(1위)으로 역전을 노렸으나 합계 성적은 또 3위(183.23점)였다.
김연아는 1년 뒤 시상대 위에서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난 2년간의 아픔이 스쳐 지나가서였을까. 지난해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싱글 사상 처음으로 200점을 넘어서며 207.71점으로 우승한 직후였다. 이날부터 김연아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월드챔피언'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김연아는 올림픽 프로그램으로 나선 3개 대회에서 전부 우승했고, 올림픽 금메달로, 스스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12년 전 약속을 지켰다.
밴쿠버=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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