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5일 건설부 장관으로 부임하여 업무현황을 파악하고 나서 주택건설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81년부터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격이 위치와 품질에 관계없이 25.7평 이하 규모는 127만원, 그 이상 규모는 134만원으로 규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81년 이후 8년 동안 땅값은 120%, 자재값은 80%, 인건비는 100% 올라 당시 서울의 아파트 건축비는 평당 170만원 이상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이 당시 서울의 아파트 시장가격은 평당 300만원에서 800만원이었다.
이러한 규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자명하다. 우선 건설업자는 주택건축을 기피할 것이다. 설사 집을 짓더라도 손실을 막기 위해 날림 집을 짓고 부실시공을 하게 될 것이다. 비싼 시장가격과 저가 분양가격의 차액은 결국 분양 받는 수요자가 차지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최악의 사회적 분배방식이다. 주택공급을 늘리는 효과는 없고 가수요를 충동하여 투기만 유발하기 때문이다.
주택건설에서 오는 부당한 초과이익이 있다면 이것은 세금 등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정당한 초과이익이 있다면 이것은 공급자에게 주는 것이 옳다. 이것은 좋은 집을 저원가로 지은 데 대한 보상일 뿐 아니라 더 많은 집을 짓도록 하는 유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동안 아파트 건설에서 오는 이러한 초과이윤을 아파트 당첨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아파트를 분양 받기만 하면 거액의 불로소득을 얻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파트를 분양 받는 사람에게 채권을 매입토록 하는 채권입찰제를 실시하기도 했지만 큰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파트의 건설은 막고 가수요는 부풀리는 최악의 주택정책을 하다 보니 주택시장이 투기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89년 봄 아파트 분양시장의 투기현상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일례로 지방인 성남의 500가구 분양에 불로소득을 찾아 1만 명 이상이 몰려들기도 했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12월 초 장관 부임인사차 조순 부총리를 찾아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분양가 현실화의 필요성을 말씀 드렸다. 학자 출신인 조 부총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건설부에 돌아와 분양가 현실화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고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도 연내에 분양가를 현실화하겠다는 것을 포함시켰다. 당시 건설부는 건설원가에 적정이윤을 더하여 분양가를 정하는 원가연동제를 과도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대충 평당 180만 원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일부 신문에 새나가 당장 분양가를 올리는 것으로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러자 분양가 인상이 급등하고 있는 집값을 더 올리고 인플레를 자극한다는 우려에서 문희갑 청와대 수석과 경제기획원 물가국장이 집값과 물가가 안정될 때까지 분양가를 손대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건설부는 분양가 현실화 조치를 실행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우선 분양가를 올리면 아파트 시장가격이 오르는가. 그렇지 않다. 아파트의 시장가격이 올린 분양가격보다도 월등히 높기 때문에 시장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분양 받는 사람의 불로소득이 줄어드는 것이다. 다소 심리적인 아파트 값 인상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설사 일시 아파트값이 오른다 하더라도 이렇게 꼭 필요한 개혁을 이 때문에 미루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뒤에도 꾸준히 분양가 현실화 조치를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4월 7일 조순 부총리와 나는 분양가를 현실화하자는 데 합의하고 이것을 4월 13일 관계 장관회의를 소집하여 매듭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청와대 문희갑 수석의 반대에 부딪쳐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시는 청와대 수석들이 그 힘으로 다시금 정책결정을 주도하는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그러면서 집값은 폭등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분양가를 올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여 집값 상승의 책임을 온통 내가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 뒤 나는 4월 20일 대통령께 5대 신도시 건설계획을 보고 하면서, 그리고 4월 26일 영구 임대주택 기공식에 대통령을 모시고 가는 차 안에서 분양가 현실화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재차 드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공직생활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신도시 계획도 확정되어 이제 집행하는 일만 남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심신도 지쳐있는 데다가 분양가 문제도 매듭짓지 못하고 부동산 투기도 잡지 못한 데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5월 중순경 나는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대통령께 이러한 나의 뜻을 전달해 주도록 요청했다. 내가 건설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였다.
내가 물러난 뒤인 89년 11월 4일 정부는 당초 내가 추진했던 원가연동제에 의한 분양가 현실화를 단행했다. 만시지탄이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어려움이 있다고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도 있다. 분양가는 일시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좀 더 일찍 현실화하는 것이 옳았다. 시장을 정상화하는 치료를 늦추면 늦출수록 그 비용이 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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