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사(奬學士)가 중학교 과학수업에 들어왔다. 교탁 위에 지구본이 놓여 있었다.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 쪽에서 23.5도 기울어져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 그래서 비뚤어진 지구본을 가리키며 장학사가 물었다. "반장, 지구본이 왜 이렇게 기울어졌어?"반장이 죄스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우리 반에서 그러지 않았어요." 장학사는 담임교사를 바라보았다. 교사 도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사왔을 때부터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장학사는 배석하고 있던 교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교장은 "국산 제품이 늘 그렇지요"하며 눈을 찡긋했다.
■ 중학생이면 다 아는 농담이라는데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학생(반장)과 교사의 썰렁한 대응, 교장의 얄팍한 처신, 장학사의 당당한 위세 등을 잘 보게 된다. 학생들이 더 잘 느껴서 얘깃거리로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는 게 슬프다. 장학사가 방문하기 전 날은 아이들에게 대청소와 환경미화가 강요된다. 날이 밝으면 교사는 목욕재계하고 와이셔츠와 정장을 꺼내 입는다. (평소 하지 않던) 준비한 교육차트를 챙기고 칠판에 수업목표와 교과진행을 정서해 놓는다. 초ㆍ중ㆍ고교가 다르지 않다. 40여년 전 우리 시절에도 그랬었는데 요즘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 서울 277명, 전국 2,518명의 장학사 가운데 상당수가 원래 목적과는 달리 '공개된 암행어사'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교사나 교육자가 아니면서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교육(행정)공무원이라 부른다. 이들 가운데 교육의 목표와 내용, 학습지도법 등에 대해 연구하며 현장을 지도ㆍ조언해야 하는 공무원을 별도 구분했고, 그 임무와 역할을 따서 '장학 혹은 연구'란 명칭을 부여했다. 교사 경력의 장학관과 연구관, 장학사와 연구사들이 그들이다. 요즘 올림픽 다음으로, 세종시 뉴스를 제치고 '장학사 비리'가 인기 뉴스가 됐다.
■ 낙후된 현장을 체감해 스스로 '코치나 감독'을 맡는 경우, 진짜 '암행어사'로 현장의 고충과 애로를 살펴 고쳐가는 사례 등 원래 목적에 충실한 장학사도 많다. 장학사 명함을 승진과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게 문제다. 교사에서 장학사로, 장학사에서 교장으로 이동하는 게 관행이니 장학사의 자리에 비리가 꾄다. 고발하면 상금을 주고, 검찰 전담부서를 만들 이유가 뭔가. 제도를 없애면 된다. 그러면 연구나 장학은 누가 하느냐고? 천만에, 우리 제도의 원조인 일본에서도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고, 웬만한 선진국에서도 한국식 장학사는 구경할 수가 없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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