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144년 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돼 쇄국의 빗장이 열리고 강제로 개항이 되어 우리나라 근대경제사의 막이 오른 날이다. 1876년(고종 13) 이날 군국주의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왕조는 몰락의 내리막길을 달렸고, 이 땅은 개명과 수탈로 교직(交織)된 근대사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읍 관청리 615번지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연무당(鍊武堂) 옛터이다. 연무당은 강화진무영 병정들을 훈련시키고 열병을 받던 곳이었다. 본래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이 있었으나 낡고 비좁아 1870년에 서문안시장을 헐고 연무당을 신축했던 것.
연무당 자리에는 '연무당 옛터'라고 새긴 기념비 하나만 쓸쓸히 서 있고, 가까운 관청리 550-1 진무영 자리에는 강화읍 사무소가, 523번지 열무당 자리에는 강화농협이 들어서 있어 이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그 날 일제(日帝)는 갑곶 앞바다에 8척의 군함을 띄워놓고 무력시위를 했으며, 열무당 앞에는 4문의 대포를 걸어놓고 꽝꽝! 공포(空砲)를 터뜨리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누가 보든 그것은 수교 수호가 아니라 공갈협박이요, 진출이 아니라 침략행위였다.
우리나라가 국제법상 외국과 맺은 첫 통상조약인 이 강화도조약을 신호탄으로 이른바 양화(洋貨)라 불린 서구의 근대적 공장제품이 다량으로 유입, 농업을 경제적 기반으로 한 전통적 가치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왕조시대의 붕괴를 재촉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75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제물포가 강제로 개항됐고, 일제는 이들 개항장을 통해 정치ㆍ경제ㆍ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구축했으며, 개항지에서 일인들의 토지 임차ㆍ건축ㆍ거주 및 일상(日商)의 무제한 진출과 자유판매권까지 확보, 식민지 경영의 첫 발을 내디뎠다.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5년의 운양호사건에 이어 1876년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쇄국의 빗장을 벗긴 개항의 서막이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문호가 개방되자 식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하고, 가혹한 경제수탈이 뒤따랐다.
강화도조약에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종주국 행세를 해온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간교 음흉한 속셈에 불과했다.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 침략에 당황한 청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1882년(고종 19) 한미 수호통상조약에 이어 한영ㆍ한독 수호통상조약 등의 체결을 주선했다. 이를 계기로 구미 각국의 자본주의가 조선 땅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에 앞서 체결된 것이 제물포조약이었다. 1879년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영종도 앞바다에 군함을 띄워 놓은 채 "개항 장소는 제물포가 가장 적합하다"고 일방적으로 생떼를 썼다. 그때 조정 대신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제물포가 어디메뇨?"하고 물어볼 정도였다.
백성에게는 범처럼 무서웠고 외세에는 이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한 정부 때문에 조선왕조는 결국 망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 날을 되돌아보는 것은 통렬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위정자가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은 잊고 집안싸움이나 하다가는 언제 또다시 내우외환과 국난의 위기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