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의 마지막 8조 경기가 진행되는 도중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손에 땀을 쥐며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이승훈(한국체대)과 대표팀의 김관규 감독 및 김용수 코치는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스벤 크라머(네덜란드)를 지도했던 네덜란드의 코치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고, 웅성웅성거리던 관중도 뭔가 잘못됐다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1만m 세계기록 보유자인 크라머는 5,000m에 이어 장거리 2관왕을 향해 달렸다. 2,000m부터 이승훈의 기록을 앞지른 크라머는 페이스대로라면 금메달이 확실시 됐다. 하지만 8바퀴를 남겨두고 모두를 놀라게 만든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17번째 바퀴를 돌고 있었던 크라머는 인-아웃 교차 지역에서 갑자기 인코스로 파고 들었다. 인코스로 달려왔던 크라머는 아웃코스로 빠져야 했지만 순간적인 판단 미스로 인코스로 진입하는 돌출 장면을 연출했다. 이로 인해 팬들은 크라머와 이반 스코브레프(러시아)가 같은 레인에서 빙판을 지치는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됐다.
크라머가 실수로 인코스로 접어들자 김관규 감독은 마지막 조 경기를 앞두고 12분58초55로 선두를 달렸던 이승훈에게 "크라머가 실수를 한 거 같다"고 귀띔하며 기뻐했다. 500m 금메달리스트 모태범(한국체대) 역시 경기 도중 이승훈에게 "너가 금메달"이라고 전했다. 어느 누구라도 크라머의 미스를 지적했더라면 그대로 실격이 되는 상황. 하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심판들은 크라머의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자신이 실수한 것을 꿈에도 알아채지 못했던 크라머는 죽을 힘을 다해 25바퀴를 다 돌았다.
크라머의 1만m 기록은 이승훈의 기록보다 4.05초 앞선 12분54초50. 자신의 기록을 보며 기뻐해야 하던 크라머는 오히려 쓰고 있던 고글을 집어 던지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너무 화난다. 짧은 순간에 판단을 내려야 했고 나의 실수는 아니다"며 코치에게 실격에 대한 책임을 전가했다.
김용수 코치는 "인코스를 두 번 돌게 되면 3초 정도 기록이 단축된다"고 말했다. 크라머가 정상적인 레이스를 펼쳤더라면 이승훈을 1초 가량 앞지르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셈이다.
밴쿠버=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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