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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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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얼룩

입력
2010.02.23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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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 원래는 같은 시인이 쓴 다른 시 '불룩한 자루'를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치웠어?/ 응, 자루에 넣어서 버렸어/ 잘했어. 글쎄, 통 밥을 안 먹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이상해서 만져보니까 차갑고 딱딱하더라구"라는 대화가 나오는 시입니다. 처음에는 그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게 사람인 줄 알고는 꽤 놀랐습니다. 돈도 못 버는 늙은 남자일 거라구요. 그런데 "찌그러지고 가장자리에 때가 새까맣던 개밥 그릇"이라는 구절이 뒤에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개가 죽었나보다고 생각했는데 시집을 덮고 돌아서고 나니 어딘지 의심스럽더군요. 무슨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 불룩한 자루 속에는 과연 뭐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가 이 시를 만났습니다. 꼭 그 자루 속을 열어본 것 같군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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