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밤잠을 설치는 대학 총장들이 한둘 아니다. '최고의 지성'으로 분류되는 대학의 CEO들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는 이유는 알고보면 아주 단순하다. 약대 유치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이기수 고려대 총장, 부드러움 속에 냉철함이 돋보이는 김한중 연세대 총장, '총장 세계의 젠틀맨'김종량 한양대 총장, 무(無)카리스마가 오히려 강한 카리스마로 교직원들에게 다가선다는 장호성 단국대 총장 등은 불면의 밤이 어느 덧 익숙해졌다고 한다.
'철(鐵)의 여인'으로 통하는 이길여 가천길재단 이사장과 옛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를 지낸 정기언 동신대 총장 등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이들 대학 총장 뿐이겠는가. 최근 정부가 발표한 약대 신설 1차 심사를 통과, 일단 가슴을 쓰려 내렸던 다른 대학 총장들의 심경도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전국 32개 대학이 약대 신설에 뛰어들었고, 이 중 절반이 넘는 19개 대학이 1차 관문을 통과했다."예선전 치곤 지나치게 많은 대학들을 걸러 냈다"는 교육과학기술부 안팎의 따가운 눈총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 대학들은 어쨌든 샴페인 준비는 할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렇더라도 지역에 따라 5배수가 넘는 대학들이 신설 약대 결정을 위한 본선 무대(현장실사 및 최종심사)에 오른 건 웬지 쓸데없는 '선심(善心)'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부가 약대 신설 대학을 확정 발표하기로 한 날은 딱 이틀 남았다. 26일이다. 대학 총장들은 물론이고 약대 유치를 준비해 온 교수와 직원 등 실무진에겐 하루가 1년 처럼 길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쯤 되면 교과부도 내년에 문을 열게 되는 신설 약대의 윤곽을 대충 흘릴만도 한데, 보안의 문을 꽁꽁 걸어잠갔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긴 하다. 지역별로 몇 개의 대학에 약대 신설을 허용할지를 결론 내리지 않았고, 뜨거운 아젠다로 떠오른 추가 증원(약대 신설 순수 정원은 350명이다) 문제 등도 관련 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와의 협의가 안된 상태에서 어느 대학에 약대가 설치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기만'이라고 여겼을 법 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함정인 걸 어쩌랴. 심사위원들로부터 서약서까지 받는 철통 기밀 방침이 있었고, "특정 대학을 배려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천명도 일찌감치 전달됐으나, 약발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부터 지역별 신설 약대 숫자를 정해놓지 않은 것은 '정원 나눠주기'의 서막이라고 봐야 옳다. 약대 신설 공고 신청을 낼때는 일언반구도 없던 추가 증원 문제를 1차 심사때 슬그머니 들고 나온 것 역시 결말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약대가 신설될 5개 지역별로 최소 2개 정도의 약대는 허용하겠다, 대충 이런 뉘앙스가 아니겠는가.
약대 신설 대학 발표일이 임박하면서 대학 총장 못지 않게 교과부의 고민도 함께 깊어지고 있다. 약대가 갖는 파급력이 간단치 않은 탓이다. 약대라는 엄청난 무기를 거머쥔 대학들은 '빅토리'를 외치겠지만, 탈락한 대학들은 가만 있을리 만무하다. 지금까지 여진이 진행형인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신설 인가 후유증의 재연이 염려스럽다.
어쩌면 교과부는 약대 이후(以後)가 더 걱정되겠으나 의외로 산뜻한 결말로 이끌 묘안도 있다. 정부 스스로 무덤을 팔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악수를 두지 말라는 뜻이다. 정부가 파놓은 '선의의 함정'에 푹 빠지면 된다. 그것이 정부가 살고, 대학이 살고, 나아가 교육이 사는 길이다. 약대의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다.
김진각 정책사회부 부장대우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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