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국가관, 민족주의, 공동체의식 같은 개념들이 더 이상 삶의 미덕으로 칭송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다국적 기업, 다인종 다문화, 영어 공용화를 통한 세계시민주의 등의 흐름을 조성합니다. 나와 너를 구별하는 제도적 경계가 무너지고 혼종적 삶의 양상이 전개되면서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의 시대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종적 삶은 결국 파편화된 개인의 뒤섞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국가에 대한 불신이 무국적주의로 이어지고, 민족에 대한 무관심이 국제미아를 낳지 않을까요?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길이 될 수 있을까요?
세계가 하나로 길이 열린다면 길목을 장악한 가장 힘 센 자가 지상 유일의 권력으로 군림할지 모르지요. 다인종 다문화 양상이 서로 뒤섞여 버린다면 그 다음 수순은 개성과 다양성의 몰락일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지구 환경은 모두 엇비슷한 삶의 패턴과 엇비슷한 유행을 따라 가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통합되지 않는 나와 너의 분명한 구별은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란 생체적이면서도 운명적인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고…."(구약 창세기) .
인류 최초 최고의 역사서이며 문학서이기도 한 성서도 결국 이렇게 가족사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가족사가 곧 창세기입니다. 국가도 민족도 불완전하고 불분명한 시대에도 가족은 이렇게 분명한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가족사를 통해서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삶의 영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가족의 영속성에 대해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족보(族譜)라는 가족사 기록이 있습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족보를 잃어버린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족의 역사에 대해 빠져 들었는지 모릅니다.
1900년 전후 경주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신 할아버지가 약관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시고, 아버지는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던 그 당시에는 호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청에서 나온 서기가 할머니에게 "이 아이가 어디 성씨요?"하고 물었는데, 할머님이 "경주 양동 이가요."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뒤에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경주 이가로 호적 정리가 되어 있었다네요. 경주 양동 이가는 경주 이가와 다른 성씨 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저도 경주이가와 경주 양동 이가의 엄연한 차이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너는 경주 양동 이가다." 이 말을 저는 어릴 적 할머니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 집은 경주 양동 이가라면서?" "그래, 우리 집안은 경주 이가 해제파란다." 이러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저희 아버지는 그만 집안 족보마저도 잘못 알고만 셈이지요.
경주 이가 가족사에는 고려시대 죽림칠현의 좌장 익제 이제현 선생이 중시조 격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경주 이가 중에는 스스로 익제공파임을 자부심으로 삼지요. 그러나 저는 해제파라고 하니, 이 부분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던 것이지요.
제 나이 이십대 중반을 넘기면서 이 의문은 풀렸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부산의 정대현 시인에게 제 가족사 이야기를 했더니, "경주 양동 이가라면 여강 이씨 집안이고, 이 집안에 해제파는 없습니다. 해제가 아니라 회재겠지요."
"......회재라니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자손이다, 이 말입니다."
"무엇이라고요?! 회재 이언적이라면 영남 유학의 태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조선 중기 최고의 명문가지요."
세상에! 아버지의 거친 부산 사투리가 회재를 해제로 발음하신 덕분에 저는 제 조상조차 잘못 알고 성장한 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 없이 떠도는 20대의 무명시인에게 회재 이언적의 존재는 칠흑같은 밤 빛나는 별빛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혼자 경주 양동을 방문했습니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고풍스런 기와집 동네였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이름이 이경춘(李敬春)인데요, 하고 말을 걸어 보고 싶어도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가난한 청춘 시절을 끝내고, 내 이름 석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때,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아득한 역사 끄트머리에 내 존재를 얹어 놓을 것이다 다짐했습니다.
그 이후 나는 누가 무어라 해도 선비였고, 생래적인 민족주의자를 자처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이 오늘의 혼돈스런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듯, 조선의 선비 회재 이언적의 자손이?믿음이 제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근거가 되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느끼는 가족의 영속성이요 역사성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