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4> 신도시 개발계획의 발표와 추진과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4> 신도시 개발계획의 발표와 추진과정

입력
2010.02.22 23:07
0 0

일산과 분당에 대한 개발계획이 마무리되어 이를 강영훈 총리에게 보고한 다음 89년 4월 20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종합적으로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4월27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경제장관들과 이한동 내무장관 고건 서울시장이 참여한 관계장관 회의를 주재하고 신도시 계획의 전모를 발표하였다.

이때의 발표내용에 의하면 분당에는 540만 평에 10만5,000가구의 집을, 일산에는 460만평에 7만5,000가구의 집을 짓고 교통난 해소를 위해서 분당-잠실 간 그리고 일산-구파발 간 전철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토지의 평당 분양가격은 분당 73만원 일산 67만 원이었다. 평촌과 산본 그리고 중동에 대한 개발계획은 이를 전후하여 별도로 발표되었다.

이 발표에 즈음하여 노태우 대통령은 5대 신도시 건설이 여의도의 20배인 1,450만 평 대지에 당시 서울 아파트 42만호의 80%에 해당하는 33만호를 지어 130만 명에게 새집을 주게 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고도 아파트 투기가 계속된다면 긴급명령권이라도 발동하겠다고 했으니 그 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문들은 거의 전 지면을 이 기사로 덮다시피 했다. 여론 조사 결과 국민들은 약 70%가 지지했으며 폭등세였던 집값은 관망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게 일면서 이 문제가 정치권에 태풍을 몰고 왔다. 국회에서는 여야 없이 정부 시책을 질타하고 나섰다. 여당인 민정당은 계획의 전면보완을, 야당인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은 전면백지화를 요구하면서 나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과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주요 쟁점은 일부 재벌 땅에 대한 특혜여부, 정보의 사전 누출 여부, 절대농지의 감소 문제,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 문제, 일산 개발의 국가 안보적 문제 등이었다.

나는 연일 국회 상임위 또는 본회의에 나가 의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해명하기에 바빴다. 의원들이 제기하는 문제에는 재벌 특혜나 정보 유출과 같은 터무니없는 것도 있었다. 결국 89년 5월 29일 국회 본회의는 '신도시 건설계획 재검토 결의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계획의 전면보완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나의 답변에는 의원들의 야유와 성토가 이어졌다. 나는 답변에서 5대 신도시가 지어지면 집값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집을 팔고 싶어도 팔리지 않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때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이 확정되면서 폭등하던 아파트 값은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러한 국회 결의에 따라 우리는 계획을 보완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이 보완은 주로 보상 이주 생계대책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보상에 있어서는 주민이 3할 이상 참여하는 보상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보상을 더 후하게 해주기로 했다. 세입자에게는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고 취업알선 센터를 운용하여 취업도 알선하기로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6월 15일 건설계획의 집행기구로서 신도시기획실을 건설부 내에 발족시켰다. 기획실은 차관보급(1급)을 실장으로 하여 국장급 2명 과장급 7명 등 모두 40명으로 구성했다.

당시 건설부는 정부부처가운데 인사적체가 가장 심해 사무관에서 10년 이상 승진하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는데 40명의 새 일자리가 생기면서 인사적체가 크게 풀려 매일 야근해온 직원들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었다. 건설부 출신으로 최초 건설부 장관이 된 추병직 장관도 그 때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기획실이 발족될 무렵 보상문제 등 난제들이 대충 해결되고 주민들과 정치권의 반대도 가라앉았다. 이때부터 건설부는 토지개발공사 및 주택공사와 일체가 되어 본격적인 건설계획의 집행에 들어갔으며 시멘트와 철근 등 건설자재의 수급대책도 따로 마련했다.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임기 5년 동안 200만 호의 집을 짓겠다던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은 91년 말까지 3년 동안에 214만호를 지어 초과 달성하게 되었다. 주택보급률을 보면 1980년 71%에서 88년 69%로 오히려 뒷걸음질하던 것을 2002년에는 100%로 이끌어 올렸는데 이것은 신도시 건설 때문이었다.

신도시 공사가 진행되면서 89년 11월 29일 최초의 분당 모델하우스 개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40만 인파가 밀려 교통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그 후 일산의 아파트 분양에도 경쟁률이 치열해 안보기피현상 때문에 일산 신도시는 실패할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가 기우였음이 실증되었다. 다만 수급계획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된 건설수요 때문에 건설 원자재 파동을 유발했던 것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었다.

나는 5대 신도시를 찾을 ㎏떪?사람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되새겨 보게 된다. 20년 전 황량한 벌판이었던 이 곳, 항의와 갈등의 현장이었던 이곳이 이제 고층 아파트의 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찬 삶을 꾸려가는 보금자리가 되고 있음을 볼 때마다 나는 깊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상전벽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신도시 건설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신 분들이 그 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행운을 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