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와 전라도 사이에 끼여있어 바닷사람과 내륙의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교역이 활발하였다. 봄과 여름 동안은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느라고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5월의 황새기젓과 7월의 새우젓이 풀릴 때는 오륙십 척의 배가 몰려들어 화장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암회색의 바다였다."(김주영의 <객주> 에서) 객주>
충남ㆍ북을 가로지르는 논산천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너른 채운들을 가로질러간 차는 늦은 겨울비의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평야 한가운데 세워진 낡은 도시로 재빠르게 진입한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
전북 무주에서 발원해 공주, 부여를 거쳐 군산으로 흘러나가는 금강 하구에 위치하는 강경은 조선 후기부터 대구, 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한 곳, 원산과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전성기에는 정주인구 3만, 유동인구 10만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요즘 강경 사람들은 10월마다 열리는 젓갈축제에 찾아오는 행락객들이나,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포교활동에 나선 인근 전북 익산시 망성면의 나바위성당을 찾는 성지순례객들만 바라보는 처지가 됐지만, 이들의 강경에 대한 자부심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읍세가 쇠했으니 법원, 검찰청, 경찰서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읍내에는 이를 반대하는 현수막 수백 장이 나부낀다. 강경의 역사를 묻는 이방인들은 주민들로부터 "강경은 대전과 함께 충남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고 은행만 3곳이 있던 곳"이라는 답을 귀에 닳도록 들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 강경은 호남선 KTX도 정차하지 않는 인구 1만 남짓한 작은 마을 정도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경은 살아있는 '근대 생활사 박물관'으로 일제강점기의 지역경제, 건축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발길을 붙든다.
한일 강제병합 후 강경에는 근대적 행정ㆍ금융ㆍ교육기관을 비롯해 경찰 등 통치기구가 설치됐고, 일본인들의 유입에 따라 전통가옥들은 일본식 가옥들로 바뀌었으며, 전통 포구의 풍경은 근대적 상업포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후 철도, 도로 교통의 발달은 강경의 몰락을 재촉했고 흥성했던 일제시대의 건축물들은 먼지가 내려앉은 채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
중앙리의 남일당한약방과 중앙초등학교 강당, 남교리의 옛 강경상업학교 관사, 염천리의 옛 강경부두노조 사무실, 서창리의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황산리의 강경화교학교, 북옥리의 북옥감리교회 등 등록문화재들은 호기심 많은 출사객들을 불러들이는 그 시대의 자취들이다.
"논산의 7개 등록문화재 가운데 6개가 강경에 있다"고 소개한 논산시 문화관광해설사 류제협(64)씨가 인도한 곳은 그러나 이런 곳들이 아니라 금강이 강경으로 돌아드는 강경천 입구의 강경갑문이었다. 방수기능용 대형수문과 수심조절용 소형수문으로 이뤄진 이 갑문은 1924년 완공됐다. 갑문의 완성으로 하루 한두 차례밖에 강경 포구를 드나들 수 없었던 배들이 상시적으로 드나들게 되고 대형 선박의 정박도 가능해지면서 강경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역시 상업포구로서의 강경의 기능이 종막을 고하면서 배들의 입출항은 뜸해졌고, 금강하구둑 공사가 완료된 1990년 이후에는 여객선마저 다니지 않게 되면서 갑문은 기능을 상실했다.
강경갑문 인근 북옥리는 1960년대 초까지도 뱃사람들을 상대하는 술집, 요릿집, 여관들로 흥성했던 곳이다. 하지만 강경의 쇠락과 함께 2008~09년 진행된 도심정비사업으로 북옥리 옥녀봉 기슭의 유흥가에 있던 가옥들도 모두 폐가로 변했다. 유흥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던 이곳의 을씨년한 풍경은 강경의 쇠퇴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객주 2세라는 강경 토박이 한영국(71)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일제시대, 해방 직후까지도 무허가 선술집이 북옥리 선창가 일대로 쭉 들어서 있었고 설이 끼여있는 이 무렵이면 술집을 단속하려는 경찰들과 상인들의 실랑이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그때는 '가장 가난한 집이 새우젓과 쌀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경이 번창하던 때였다."
일제가 강력한 자본과 기술을 앞세워 근대 물질문명의 위력을 과시한 상징물이 강경갑문이라면 금강과 강경포구, 평야와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해발 45m의 옥녀봉은 한국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려 했던 일본인들과 이에 저항한 이들의 흔적이 서린 곳이다. 봉화대와 수운정이라는 유서깊은 정자가 있던 옥녀봉에 일본인들은 벗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으로 바꾸고 신사를 세웠다. 해?후 신사는 파괴됐지만 신사 관리인이 거주하던 관리사무소는 지금도 남아 오욕의 역사를 증언한다. 지금은 '옥녀봉 가게'라고 불리는 간이 점포가 돼 있는 이 건물은 내부구조는 바뀌었지만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본인들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기독교가 승했던 강경지역의 한인들은 신사 대신 교회를 찾았다.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인 옥녀봉 정상의 강경침례교회(1896년) 터, 국내 최고(最古)의 한옥 교회인 북옥감리교회(1923년), 1925년 신도들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던 흥교리의 강경성결교회 등은 강경 근대사에 아로새겨진 지배와 저항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강경읍은 2005년부터 '강경 고도 되살리기 사업' '근대문화재 복원사업' 등 강경의 전성기를 복원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식민지의 기억에 가위눌려 있던 강경이 100여년 만에 그 낡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거듭나려는 몸짓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강경 객주들의 저항
1890년대 후반부터 강경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 우세한 자본과 기술, 자국시장 접근능력, 식민권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강경 상권을 장악해갔다. 그러나 토지, 미곡, 공산품, 운수업, 전기업 등 전 분야에 지배력을 행사했던 일인들도 해산물 유통 분야에서만은 '객주(客主)'라는 특유의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저항을 꺾지 못했다.
1915년 일상(日商)들의 일방적인 어시장 개설이 갈등의 불씨가 됐다. 일상들이 어선을 강제로 끌고 들어와 어시장에서 영업을 강행하려 하자 한인 객주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중재에 나선 면 당국은 어시장과 객주들이 공동경영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객주들은 강경포구에서 2㎞ 떨어진 전북 익산의 낭청포로 이주해 영업을 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일상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새로운 세원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권력의 객주업 통제책은 점차 강화됐다. 1918년에는 도로변에서 행해지는 객주 행위가 도시위생 및 통행 문제를 발생시킨다며 객주들을 압박했고, 1919년에는 면 당국이 직접 어채시장을 설립하고 일상들의 주도로 설립된 유통회사에 경영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객주들의 유통망을 와해시키지 못하자 1930년대 들어 식민권력은 한인사회의 대응을 분열시키는 방식을 시도했다. 면 당국은 객주업과는 무관한 친일 성향의 한인 자산가들을 내세워 1936년 해산물유통회사를 설립한 뒤 어채시장 경영권을 위탁했다. 동시에 경찰을 동원해 어채시장의 허가 없이 영업하는 객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강경 이외의 다른 포구에서 강경 객주들과 거래하는 어선들도 단속했다. 객주들은 진정서를 내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저항하다가 1930년대말 결국 어채시장에 중계수수료의 일부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지루한 싸움을 마무리했다.
식민당국은 외형상으로 강경 객주들을 굴복시켰지만 승자는 객주들이었다. 1920년대 일상들이 운영한 어채시장의 거래는 강경 전체 해산물 유통의 10~15%에 불과했다. 객주들이 당국과 타협한 이후인 1940년대 어채시장의 거래액은 1920년대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강경은 식민지적 근대성을 역동적으로 수용한 역사공간"
강경은 조선 후기에 상업 발전과 함께 성장한 포구상업도시였다. 금강 수운의 이점과 강경평야, 서해 어장이란 배후 산업기지를 활용하여 전국 3대 시장과 2대 포구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성장한 것이다.
일제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강경을 충청·전라 내륙지방 침투의 식민거점으로 개발코자 했다. 이를 위해 동원한 것이 일본제국과 근대문명의 위력이었다. 일제는 경찰ㆍ동양척식회사 등 식민 통치ㆍ척식기구, 각종 관제 단체, 신사 등 식민지 지배망을 촘촘히 설치해 강경 주민의 일상생활을 감시, 통제하고 일본인의 사회경제와 문화 활동을 지원했다. 또한 철도, 교량, 포구갑문, 강경운하, 금강제방 등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열차, 증기선, 전신ㆍ전기 등 근대문명의 이기를 활용함으로써 강경주민을 압도하고 '내륙 포구도시 강경-식민 항구도시 군산-일본 본국시장'이라는 식민지적 유통망을 구축했다. 이런 조치에 힘입어 강경은 충남 제2의 식민도시로 성장했고 일본인은 강경 경제를 지배했다. 일제 또한 이를 토대로 한국인 지방유지를 포섭해 식민지배의 안정화를 꾀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경 지배와 장악에는 한계가 있었다. 강경 주민들이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해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 기반을 지키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객주, 지주, 기자, 전직교사 등 지방유지가 있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근대 문명과 기술을 적극 수용했다. 학교, 야학, 교회, 병원 등을 건립했으며 전통적인 숙박업, 금융업, 위탁판매업, 포목상, 약종상 등을 더욱 발전시키고 근대적인 정미업, 제화업, 양조업, 운송업 등에 진출하여 일본자본과 경쟁했다. 지역발전과 대중계몽을 위한 각종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다양한 친목ㆍ이익단체를 결성하여 한국인사회의 연고망과 조직망을 다져갔다. 다른 한편 이들은 덕유정(국궁) 등 민족적 문화 공간과 내재적 유통체계를 지켜갔다. 특히 강경객주들은 해산물 유통망을 개편, 통제하려는 일제의 기도에 맞서 20년 이상 끈질기게 싸우면서 재래의 객주 유통체계를 지켰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내재적 발전의 선진지대인 강경의 변화를 초래한 힘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강경을 내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고 개발한 '제국'과 근대문명의 위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사회 경제 및 문화 기반을 지키고 발전시키려던 한국인의 역동적 대응이었다. 이런 점에서 일제강점기의 강경은 서구 및 일본의 식민지적 근대성이 일방적으로 관철된 타율적 시공간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내재성과 민족성이 식민지적 근대성과의 다채로운 수용ㆍ결합ㆍ대항을 통해 근대성을 재구성해간 역동적인 역사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연태ㆍ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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