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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스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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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스케이트

입력
2010.02.2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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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겨울이면 종일 얼음을 지쳤다. 굵은 철사를 댄 각목 두개 위에 널빤지를 얹은 얼음썰매가 성에 차지 않아 어머니를 졸라 대장간에서 벼린 칼날을 박은 썰매로 바꾸었다. 앉은뱅이 썰매가 긴 송곳 막대를 이용해 서서 타는 썰매로 바뀌고, '철사 스케이트'가 그 뒤를 이었다. 각목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어 굵은 철사를 아래에 깔고, 위에는 빙 돌아가며 못을 박았다. 그 위에 신발 채로 발을 올려놓고 못에 노끈을 걸어 얼기설기 묶었다. 철사는 이내 칼날로 바뀌었지만, 가죽신이 붙은 스케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지금은 대형 쇼핑센터와 견인차량 보관소가 자리한 면목동 유수지의 양어장이 겨울에는 대형 스케이트장이 됐다. 시골 운동회와 흡사한 풍경이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얼어붙은 연못 둘레에는 스케이트 날 가는 아저씨, 호떡과 국화빵 장수 등이 작은 천막 노점을 펼쳤다. 확성기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포크 송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데뷔와 함께 폭발적 인기를 누린 '4월과 5월'의 노래가 가장 기억에 또렷하다. <화> 나 <옛사랑> 만큼은 아니지만, 스케이트장에서는 <영화를 만나> 도 인기였다.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영화/ 선녀처럼 스케이트 타던 영화와/ 부딪치고 나서 미안하다 말하자/ 무표정했던 영화.'이 '영화'와 '너와 맹세한 반지 보며/ 반지같이 동그란 너의 얼굴 그리며'로 시작되는 <화> 를 함께 들으면 싱어 송 라이터 백순진의 첫사랑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의 소박한 노래처럼 스케이트장은 당시 청소년들이 이성과 만날 수 있던 드문 공간의 하나였다. 도심의 동대문운동장을 비롯해 변두리 유수지나 논바닥에 겨울이면 문을 열었던 스케이트장에서 첫사랑을 만난 남녀가 '영화'와 '순진'이만은 아니었을 게다.

■그렇게 만났거나 <영화를 만나> 와 같은 우연한 만남을 꿈꾸며 스케이트장을 찾던 세대가 결혼해 낳은 아이들이 자라서 눈부신 스케이팅 실력을 뽐내고 있다. 동네 스케이트장의 선녀였던 '영화'와 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던 '순진' 세대의 아들딸들이 세계의 '연아'로, 정상의 속도로 얼음판을 질주한 '태범''상화'로 컸다. 그때의 스케이트장이 지금은 스키장으로 바뀌었다. 스키장에서의 만남을 주제로 한 인기가요는 아직 없지만 겨울마다 스키장에 몰리는 인파를 보면서, 머잖아 눈밭에도 태극기가 휘날릴 것이란 행복한 예감에 젖는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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