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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보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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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보리처럼

입력
2010.02.2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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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보면 절하고 싶다. 보리를 관광용으로 심어 청보리축제를 하는 곳도 있지만 요즘 농촌에선 보리 구경하기 어렵다. 귀하다 보니 들길 가다 보리밭을 보면 꾸벅 절하고 싶은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 살며 겨울과 봄 사이의 보리밟기를 거들었다. 한 마을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모여 보리밟기를 했다. 보리는 꼭꼭 밟아줘야 잘 자란다고 했다.

눈이, 함박눈이 내리면 올핸 보리풍년 들겠다고 했다. 나이 들어 보리밟기는 겨울 동안 들뜬 흙을 눌러 주는 일인 것을 알았다. 그래야 보리의 뿌리가 잘 내린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런 이유를 알고 나니 보리밭이 사라지고 보리밟기가 사라졌다. 들판 풍경이 황량한 요즘, 보리밭의 녹색을 보면 힘이 불끈 솟는다. 혹한 속에서, 잦은 폭설 속에서 보리는 제 빛을 잃지 않고 굳세게 자란다. 오래지 않아 보리가 팰 것이다. 보리 안 패는 삼월 없고 벼 안 패는 유월 없다 했다.

보리가 패고 보리가 누렇게 익는 철을 보리누름이라고 한다. 나는 보리밭을 보리가람, 보리를 보리부처라 부른다. 망종 무렵 익어가는 보리는 황금보리라 부른다. 보리농사가 돈이 안 되는데 귀한 땅에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은 불가에서 말하는 '보리(菩提)'를 얻은 사람이다. 수행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가 보리다. 손해를 보며 사는 일도 큰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시인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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