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은 동서 냉전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이다. 20세기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해이다. 그 해 2월에, 그로부터 21년이 흐른 뒤 자신들의 이름을 전세계에 드날리게 되는, 모태범과 이상화가 열흘 간격으로 태어났다.
애국 넘어 개인적 성취로
그들이 있기 전에 한국 빙상에는 이영하가 있었다. 배기태와 김윤만이 있었으며 이규혁과 이강석이 뒤를 이었다. 나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30여 년 전의 어린이 신문이나 잡지에서 이영하 선수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 당시 전성기를 보낸 같은 이름을 가진 미남 배우와 겹치는 이 매력적인 이름의 선수는, 눈물을 빵으로 삼아 얼음판을 거침없이 질주했던 인간 승리의 한 표상이었다.
이영하 선수는 1985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51차례나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웠다. 그에 대한 기억의 잔상은 가난하였으므로 배가 고팠으나 결연한 의지와 불굴의 기개로 만방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떨친 애국의 화신이었다.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다. 홍수환이 그랬고 차범근이 그랬으며 하형주, 임춘애까지 다들 그랬다.
지금은 사뭇 풍경이 다르다. 동갑내기 모태범과 이상화 선수에게 '애국'의 이미지를 겹쳐 놓는 것은 어쩐지 철 지난 유행가 같다. 물론 이 젊은 선수들이 애국심이 없다거나 과거 선수들이 개인적인 감성을 갖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 시대의 삶의 구조가 바뀌고 그에 따라 문화와 감성이 바뀌게 되면 그 선수의 뛰어난 성취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 가난했으며 억압적이었던 시절에는 모든 시민적 감성이 '애국심'이나 '국위 선양'이라는 강철 그릇에 담겨야만 했다. 메달이라도 따면 우선 대통령 각하의 격려전화부터 받아야 했다. 1974년 홍수환 선수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울먹였던 일이나, 1984년 하형주 선수가 '어무이, 이제 고생은 끝났심더' 라며 눈물을 삼켰던 그 많은 격정들이 있긴 하였으나, 그것을 둘러싼 모든 말들은 역시 '애국심'이었다. 애국심은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둔탁하게 강요될 때 그 속에서 어두운 강박을 낳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이용대가 '살인 윙크'를 보여주었듯이 모태범과 이상화의 금빛 질주를 둘러싼 풍경들은 이제 스포츠에서의 빛나는 성취를 애국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케 한다. 다양한 감성과 취향이 두 선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20세기 내내 우리 스포츠를 압도했던 애국과 애국심의 말 잔치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 자리를 선수 개개인의 기발하고 싱싱한 취향과 발언이 채우고 있다.
팬들의 찬사도 '태극전사'를 호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과 성장에 대한 일종의 '팬덤' 현상을 보여준다. 언론 역시 이번 올림픽부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두 선수에 대하여 보다 친근하고 정서적인 접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배인 이규혁 선수를 과감하게 다루면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지난 시절의 둔탁하고 위압적이었던 차별의 시선을 슬며시 밀어내고 있다.
새로운 시대와 사회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인가. 당장 그렇게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틀림없이 다양한 취향과 감성과 시선이 어울리는 좀더 새롭고 신선한 시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사의 대격변이 터졌던 1989년에 태어난 두 선수의 금빛 질주와 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민적 감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정윤수 문화스포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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