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석(24ㆍ고양시청)은 여전히 표정이 밝지 못했다. 21일(한국시간) 천신만고 끝에 따낸 쇼트트랙 남자 1,000m 은메달로도 그간의 마음 고생을 털어버리기에 부족한 걸까. 지난 14일 남자 1,500m에서 금메달을 위해 안쪽으로 파고들다 성시백(23ㆍ용인시청)과 충돌, 동료의 은메달까지 날린 '죄인'으로 몰린 그였다.
그간 훈련에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던 이호석은 취재진의 질문이 있을 때마다 "할 말이 없다. 지금은 경기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이날 성시백과 메달을 나눴다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성시백은 준결승에서 0.006초차로 결승 진출이 좌절됐고, B파이널에서는 몸싸움을 하다 실격 당하는 등 불운을 떨쳐내지 못했다.
1,000m 결승에서 이호석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밝혀진 건 이정수의 인터뷰에서였다. 이정수는 경기 후 "이번 결승은 솔직히 내 스타일의 레이스가 아니어서 당황했는데, (이)호석이형이 4바퀴째부터 일찍 시작해 줘서 외국선수들이 체력 소모가 많았다"며 금메달의 공을 이호석에게 돌렸다.
순간적인 폭발력이 다소 부족한 이정수는 초반부터 상위권에 나서야 수월한 레이스가 가능한 유형. 이날은 캐나다 선수 2명이 시작하자마자 1, 2위를 달리면서 어려운 레이스가 예상됐다.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이호석이 질풍같이 앞으로 나서 레이스를 주도했고, 이에 이정수도 뒤를 따르며 추월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정수는 마지막 바퀴에서 이호석마저 추월했고, 피니시 라인 직전 혼신의 날 디밀기로 2관왕을 달성했다.
후배의 얘기를 전해 들은 이호석은 쑥스러운 듯 "나는 나대로 찬스를 엿보다가 앞으로 나갔고, (이)정수도 내가 나간 틈을 타 찬스를 얻은 것뿐"이라면서 "(이)정수와 막판까지 선의의 레이스를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이호석은 또 일주일 전 성시백과의 충돌 상황을 떠올리며 "지난해 발목을 다치면서 실전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내 스타일의 경기를 치르지 못하다 보니 불의의 사고가 생겼다"고 밝혔다. "내 실수로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내 잘못"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밴쿠버=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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