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도 잘 안 들리는 애비랑 공부하느라 우리 딸이 고생 많았다." (아버지)
"아니에요. 아버지 아니었으면 이런 학교가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요."(딸)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2년제 학력인정학교인 진형 중ㆍ고등학교 대강당. 중ㆍ고교 졸업식이지만 900명에 달하는 졸업생 대부분이 40~60대의 중장년 학생들이었다. 이 '나이 든' 졸업생들 중 80대의 노인과 50대의 주부가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이 둘은 부녀지간 이면서 중ㆍ고등학교 동기동창이 된 김종배(85)씨와 김화자(55)씨. 팔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 50대 중반의 딸이 4년 내내 같은 반에서 공부하며 만학의 꿈을 이룬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이 부녀의 도전은 2006년 개교한 진형 중ㆍ고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김종배씨가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지 못했던 미안함에 딸에게 먼저 입학을 권했다.
김종배씨는 "강원도 탄광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바람에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70년대 들어 사업이 어려워져 딸을 초등학교밖에 보내지 못한 게 평생 마음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여자가 많이 배워 뭐하냐'며 학교에 안 보냈지만 사실은 형편이 어려워서 그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때 아버지를 원망했다는 딸 김화자씨도 4년간 배움을 같이 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그는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를 많이 미워도 했지만, 막상 내가 자식을 낳고 보니 다 이해가 되더라"며 "8년 전 어머니가 먼저 가셔서 졸업장을 보여드릴 수 없는 게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이 들 부녀는 4년간 공부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날 졸업한 900명 학생들 중 최고령자임에도 인터넷 활용능력을 익히는 등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특히 중학교 과정에 재학 중이던 2006년에는 독감에 걸리고도 링거를 맞으며 출석하는 등 한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런 김씨에게 김화자씨는 효심 깊은 딸이자 동반자였다.
딸은 귀가 어두운 아버지를 위해 매일 저녁 수업 내용을 일일이 다시 읽어주는 등 가정교사를 자처했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전산분야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바쁘지만 시간을 쪼개 아버지를 도왔다.
김화자씨는 "4년간 매일 아버지를 모시고 학교에 가면서 불륜관계로 오해를 받았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며 "안양에서 종로까지 1시간 거리여서 아버지가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무사히 마쳐 기쁘다"고 말했다.
이 날 졸업식에는 큰 오빠가 대표로 찾아와 졸업을 축하했다. 김화자씨는 앞으로 대학에 진학해 전산학을 좀 더 공부해볼 계획이다. 처음 입학 때만 해도 '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뀐 것이다.
담임 황은신(37) 선생은 "김 할아버지는 최고령자임에도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고, 딸의 지극한 효심도 재학기간 내내 귀감이 됐다"며 "꿈을 갖고 노력한다면 언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부녀가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박은성기자 es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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