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李滉ㆍ1501~1570)의 <자성록> 은 제자들에게 답한 22편의 편지글을 모은 책으로, 여기 붙인 머리말은 도학자(道學者)로서 퇴계의 겸손한 자성의 모습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자성록>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한 것은 자기의 실천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이제 벗들과 편지 왕복으로 진리를 탐구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나,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미 말해 버린 뒤에도 저쪽에서는 잊지 않고 있는데, 나는 잊은 것도 있고, 저쪽과 내가 함께 잊은 것도 있다. 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기탄이 없는 자에 가까운 것이니, 두렵기가 그지없다. 그 동안 옛 책장을 찾아서 보존되어 있는 원고들을 다시 베껴서 책상 위에 두고 때때로 열람하면서 여기에서 반성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자성록> 서문, 도광순 역) 자성록>
조선의 도학파는 벼슬하는 글쟁이들[詞章派]과는 달리 지방의 선비층[士林層]으로, 천도(天道)를 따라 수기(修己)를 목표로 마음 수양에 몰두했던 실천적 선비들이다. 도학자로서 퇴계는 이 짧은 글에서도 "부끄럽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스스로의 말과 실천을 반성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벗들이라고 한 제자들에게 부끄럽다고 하고. 그것도 두렵기 그지없는 부끄러움이며, 이런 반성을 거듭하는 것이 편지글로 쓴 <자성록> 의 목표이며 가치였을 터이다. 이런 뜻은 <자명(自銘)> 으로 이어졌는데, 스스로 쓴 이 묘지명(墓誌銘)에서도 그는 "만년에 어찌하여 벼슬에 나갔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더 아득하다" 고 고백한 바 있다. 자명(自銘)> 자성록>
그리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지은 60살 뒤로는 7년간이나 서원에 숨어 연구에 정진했고, 이 사이에 기대승과 나눈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그 중의 압권이다.
특히 사단칠정론은 그의 사상의 독창이며, 그의 성리학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성하고 연구하는 진면목은 세상을 떠나기 23일 전 병상에서 기대승에게 보낸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편지글> 로, 그가 이미 해온 해석의 잘못을 고쳐 써 보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퇴계는 1501년 출생으로 남명 조식(南冥曺植)과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도학의 두 영수이면서, 기질은 아주 달랐다. 남명은 퇴계와 달리 도학에 매진하고, 풍자와 비판으로 백성의 편에서 할 말을 쏟아 낸 평생 산림처사(山林處士)였다. 조남명은 퇴계를 가리켜 "임금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을 가졌다"고 평가하면서도 학자들이 물 뿌리고 청소하는 소학(小學)의 절차도 모르면서 헛되이 천리(天理)를 논한다고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고, 퇴계는 "남명이 우리를 비판한 말에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성하며 제자들을 타일렀다.
이에 비하면 지금은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퇴계와 남명의 선비정신을 다시 말하는 까닭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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