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핀, 칫솔부터 신발, 인형, 장난감, 옷까지. 온통 핑크색 물건으로 가득한 방 안에 핑크색 옷을 입고 있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있다. 소녀는 핑크 세상의 일부다. 반면 완전히 파란색 물건으로 뒤덮인 방도 있다. 물론 그 방의 주인은 남자 아이다. 아이들의 물건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부모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선택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분홍과 파랑, 여성성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하다.
사진작가 윤정미(41ㆍ사진)씨의 '핑크&블루 프로젝트'다. 아이들이 소유한 물건을 통해 성 정체성의 강요, 물질주의 등 현대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는 사진 작업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2005년 유난히 분홍색에 집착하는 다섯 살짜리 딸 서우를 서우의 물건들과 함께 카메라에 담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인종은 달라도 '여자 아이는 분홍, 남자 아이는 파랑'이라는 공식이 굳건히 지켜지는 것을 보고 점차 작업을 확대해갔다. 윤씨는 2007년 금호미술관에서 이 프로젝트를 처음 발표한 이후 스페인, 뉴욕, 베이징 등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러시아, 멕시코 언론에까지 소개됐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올해, 윤씨는 서울 팔판동 갤러리인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핑크&블루 프로젝트Ⅱ'를 통해 그 아이들의 방이 이제는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3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려있는 두 장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확연하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미소짓던 맨해튼의 소녀 테스의 방은 완전히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핑크는 유치해서 싫다"는 마이아의 물건들은 이제 분홍색과 파란색이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고, 초등학생이 된 서우도 더 이상 분홍색 물건을 사려하지 않는다. 쌍둥이인 로렌과 캐롤린의 경우에는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둘의 물건이 양분됐다. 반면 남자 아이들의 방은 남색으로 약간 더 짙어졌을 뿐,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은 5~8세 때 핑크색에 강한 집착을 보이다가 그 이후에는 보라색, 하늘색 등으로 선호 색깔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더군요. 남자 아이들의 경우는 특정 색깔에 대한 집착이 덜하기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그들을 위한 상품 자체가 파란색으로 한정돼 있거든요."
사진에서는 색깔뿐 아니라 물건의 종류도 관찰할 수 있다. 여자 아이들의 장난감은 대부분 화장품이나 요리 도구, 인형 등이고 남자 아이들의 것은 스포츠 용품이 많다. 또 국적이나 사는 곳에 관계 없이 키티, 바비, 미키마우스 같은 캐릭터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동심의 세계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글로벌 기업들의 영향력이 읽힌다.
윤씨는 "성에 따라 고착화된 색깔에서 출발한 작업이지만 뜻밖에 많은 의미들이 발견됐다"며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발전해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가진 물건들의 색깔과 종류뿐 아니라 표정, 포즈 등의 변화도 탐색할 생각입니다. 긴 시간에 걸친 문화인류학적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시는 3월 5일까지. (02)732-4677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