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솔숲 아래로 천리 만리 겨울바다가…
바다를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겨울 바다의 적막함을 완상하기 위해서다.
닭벼슬처럼 생겨 툭 튀어나온 태안반도의 끝자락. 리아스식 해안의 전범을 보여주는 해안가는 기암이 어울린 아름다운 백사장들이 목걸이 구슬처럼 줄줄이 꿰어있다. 1978년 13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안해안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의 중심인 만리포와 천리포해수욕장으로 겨울바다 기행을 떠났다. 걸음이 향한 곳은 바다가 아닌 산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절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곳이다.
가운데 곶처럼 돌출된 자그마한 동산이 만리포와 천리포 해수욕장을 잇고 있다. 두 백사장의 배후엔 긴 산자락이 누워있다. 정상 국사봉의 높이가 121.8m로 산세는 높지 않지만 바닷가에 바로 붙어있어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산행길은 천리포에서 시작해 만리포로 내려온다. 천리에 만리를 더한 '일만일천리'의 풍경을 만끽하는 걸음이다. 실제 걷는 것은 4km도 안되는 거리이니 저절로 축지의 술법이 부려지는 걸음이다.
천리포해수욕장 뒤편, 천리포수목원 생태교육관 앞에서 산행이 시작됐다. '천리포 1길'이란 골목길에서 집 한 채를 돌자 밭두렁 옆으로 산길이 이어졌다.
지난 밤 내린 눈으로 산의 능선은 하얗게 설화를 피워댔다. 길 위에도 얇게 눈이 깔렸다. 발자국에 얇은 눈이 녹아버린다. 하얀 화선지에 수묵화의 댓잎을 치는 것처럼 지난 발걸음마다 먹물이 스몄다.
예상치 못한 화사한 눈선물에 마음은 마치 첫눈을 만났을 때처럼 들떠 동동거렸다. 산길이 깊어지며 눈은 발목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길은 미끄럽지 않았고, 스패치와 아이젠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걸을 만 했다.
오르막마다 나무를 박은 계단이 길게 놓여져 어렵지 않게 눈길을 오를 수 있었다. 조금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천리포 백사장 앞 닭섬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간조때라 물이 빠져 닭섬과 천리포 백사장이 이어져 있었다.
숲길을 둘러싼 나무는 죄다 소나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듯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솔숲이 이국적이다. 바닥의 솔잎과 눈이 함께 완충해서인지 산길은 유난히 푹신했다.
첫 오르막을 오르고 나서 평탄한 능선길이 시작되는 곳에 이정표 2개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 다른 모양인 것을 보니 한 날에 세워진 것은 아닌가 보다.
좀더 새 것인 이정표는 국사봉까지 1km를 가리켰다. 바로 옆 다른 이정표는 국사봉까지 0.9km라고 써있다. 이정표대로라면 그새 100m가 줄어들었다. 산행객에게 중요한 이정표를 누군가 대충 꽂아놓은 것이다.
이 코스가 정말 재미있는 첫번째 이유는 적절한 오르막이 리듬을 타듯 이어진다는 것이다. 땀 좀 날만 하면 금세 평탄한 능선길이 연결돼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두번째는 시작부터 끝까지 소나무 숲길을 지나는 것이고, 세번째는 바다를 계속 내려다 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이 쌓인 솔숲의 한적한 산행길. 솔향에 설향까지 더해져 마음이 하얗고 상쾌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다.
마침내 국사봉 정상에 섰다. 닭섬을 중심점 삼아 컴퍼스를 돌리듯 천리포 바다가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왼편으론 만리포가 아련한 해무 속에서 또 다른 큰 포물선을 그렸다. 설경의 만리포, 설화가 피어난 천리포 풍경이다.
바다를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이다. 멀찍이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보듯 바다를 선망하는 시선이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다 눈을 들어보니 하염없이 내리던 눈발이 언젠지 모르게 그쳐 있었다. 고요한 하얀 적막. 닭섬에 부딪는 파도소리가 눈 덮인 숲 위로 퍼져 올랐다.
2007년 12월 태안의 아름다운 바다에 들이닥쳤던 검은 기름의 참사를 떠올렸다. 오염의 흔적은 지워진 지 오래지만 오염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터. 소복하게 내린 하얀 눈이 그 기억마저 다 덮어버렸다. 이보다 맑고 순정한 바다가 또 있을까.
만리포해수욕장까지 산길을 이어 내려왔다. 도중에 국2봉, 국3봉 등의 이름을 한 전망포인트가 더 나타났다. 만리포가 좀 더 잘 보이는 곳들이다.
산길을 다 내려와 도착한 곳은 만리포해수욕장 입구의 주차장이다. 2시간도 채 안된 시간에 천리포와 만리포를 잇고 바다와 산을 이었다.
■ 여행수첩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서산IC에서 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 태안을 지나 계속 만리포쪽으로 달린다. 만리포해수욕장을 지나 천리포해수욕장의 천리포수목원 생태교육관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태안의 먹거리로는 개운한 박속낙지탕이 유명하다. 태안 원북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원풍식당이 원조를 자처한다. 외관은 허름해 보여도 30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집이다.
주인인 목예균씨는 "무나 감자 등 이것저것 다 넣고 만들어 봤지만 역시 낙지는 박속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고 소개했다. 박속은 시원한 맛을, 숭숭 썰어 넣은 청양고추는 칼칼한 맛을 내며 달큰한 낙지와 환상적인 맛의 조화를 낸다는 것. 박속밀국낙지탕 1인분에 1만2,000원. (041)672-5057
태안의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 겨울별미가 숨어있다. 안면도가 감싼 천수만 자락의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의 굴구이 단지다. 바다를 끼고 90여 채의 굴구이 집이 죽 늘어서 있다. 가스불에 올려진 석쇠에 껍질 채 굴을 올려 구워먹는 곳들이다.
굴구이는 맛도 맛이지만 저렴하게 배불리 즐길 수 있어 좋다. 4, 5인용 굴구이 한 바구니가 2만5,000원이다. 천북수산(041-641-7223) 등 굴구이집에선 집에서 굴구이를 즐길 수 있도록 택배로 보내주기도 한다. 굴구이는 4월까지 계속된다.
■ 트레킹 팁
등산이나 트레킹을 할 때 가장 필요한 장비를 꼽는다면 자켓과 등산화를 들 수 있다. 자켓은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나 조난 등에 대비해 기능성 제품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자켓을 고를 때는 비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수 방풍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직접 착용해본 후 가벼우면서도 내 몸에 꼭 맞고 활동했을 때 조이거나 불편하지 않은 것을 고른다.
후드를 탈부착할 수 있는지, 수납 기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어두운 색상 보다는 밝은 색상이 긴급사고나 조난에 대비해 더 안전하고, 나들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주니 이왕이면 밝고 화사한 색상을 고르도록 하자.
등산화는 산길이나 계곡길, 바윗길, 자갈길 등 다양한 지형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튼튼한 제품을 고르는 것이 좋다. 방수 기능이 있는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것이 물에 젖었을 때 물기를 막아주어 안전하다.
장시간의 트레킹을 고려해 비교적 가벼우면서도 발을 안정적으로 잡아주고 착화감이 뛰어난 제품을 고르도록 한다.
도움말=노스페이스
태안=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천리포수목원·두웅습지가 인근에
천리포 해수욕장 옆에는 아름다운 화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귀화한 파란 눈의 민병갈(미국이름 칼 밀러ㆍ1921~2002)씨가 1962년 설립한 개인 식물원이다. 식물 보호를 위해 40여년간 회원제로만 운영되던 '비밀의 화원' 천리포수목원은 지난해 봄부터 일반에 개방됐다.
고인은 1945년 미군장교로 우리나라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 땅에 매료된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고,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62년 만리포해수욕장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지금의 이 땅을 사게 됐다.
그리고 손수 농원을 조성했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는 전세계 식물원, 수목원과 종자와 정보를 교환하며 천리포수목원을 예쁘게 가꾸어 나갔다.
세계수목협회에 의해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약 60만㎡에 이르는 수목원에는 1만5,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눈발이 날리는 지금도 천리포수목원에는 꽃을 피운 나무가 있다. 섣달에 피는 매화라는 뜻의 '한객(寒客)'으로도 불리는'납매'다. 눈을 이고 있는 메마른 가지에서 작게 피어난 노란 꽃의 향기가 유난히 짙다. 꽃향기가 귀한 겨울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수목원 바로 앞에 떠있는 섬이 닭섬이다. 물이 빠지면 백사장과 연결된다. 민씨는 유난히 닭을 싫어해 닭섬을 '낭새섬'이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수목원에서 이 낭새섬(닭섬)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고즈넉한 전망대와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천리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두리해안사구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된, 국내에선 보기 드문 모래언덕이다. 흰눈이 내리는 날 찾은 길고 긴 신두리 백사장은 하얀 눈을 이고 있었다.
이곳 해변의 모래는 작은 바람에도 흩날릴 정도로 가볍고 곱다. 이 모래가 차곡차곡 다져진 백사장은 사람이 걷고 차가 달려도 그 자국이 깊게 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신두리해안사구 뒤쪽에 '두웅습지'란 곳이 있다. 국내에선 보기 드문 사구배후습지로 2007년 울산의 무제치늪과 함께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곳이다.
신두리해안사구 입구에서 좁은 길을 따라 1.7km 가량 달려가 만난 '두웅습지'. 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래언덕에 막혀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 습지가 형성된 것이다. 습지 전체의 면적은 6만5,000여㎡. 습지 가운데에 수심 2.5m 가량의 호수가 있다.
물가엔 나무데크로 된 탐방로가 길게 놓여있고, 작은 배 한 척이 그 나무 기둥 하나에 묶여 있다. 흰 눈을 소복하게 이고 있는 작은 호숫가의 풍경이다. 원시 늪이 주는 한적한 풍경에 마음이 조용히 녹아든다.
이곳은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습지다. 멸종위기 동물인 금개구리 등을 비롯해 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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