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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8년 전의 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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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8년 전의 그 사건

입력
2010.02.1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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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봄날의 새벽, 서울 주택가에서 한 여학생이 홀연히 사라졌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이화여대 법대생 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열흘 뒤 하양은 경기 광주의 산속에서 얼굴과 머리에 공기총 6발을 난사 당한 무참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누구보다 착하고 예뻤던 딸의 죽음을 아버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업을 접고 직접 범인을 잡으러 국내외를 뒤지고 다녔다. 그러기를 1년여. 마침내 범인들이 중국에서 체포, 압송됐다. 말할 것도 없이 범인 검거는 온전히 아버지의 힘이었다.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해사건'이다.

▦사건의 전모는 충격적이었다. 숨진 하양의 이종사촌오빠인 현직 판사의 장모 윤모씨가 자기 조카를 시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윤씨는 지난 정권에서 총리와의 부적절한 골프회동 등으로 물의를 빚었던 영남제분 회장의 부인. 그가 이종남매간인 하양과 판사 사위의 사이를 터무니없이 의심한 것이 살인을 청부한 동기라는 게 이후 수사와 재판의 일치된 결론이었다. 결국 살인을 교사한 윤씨, 직접 살인을 저지른 조카와 그의 친구 등 3명 모두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확정판결 직후 윤씨는 남편과도 이혼했다. 편집증이 부른 참담한 비극이었다.

▦이 사건이 다시 법정에 올려졌다. 윤씨의 조카가 "고모가 죽이라고 했다"던 당초 진술을 돌연 번복하고 나선 때문이다. "사실은 미행 지시만 받았는데 엉겁결에 죽이게 됐다"는 것이다. 윤씨는 여기에 걸어 곧바로 조카를 위증혐의로 고소했으나 검찰은 둘이 짜고 진술을 바꾼 것으로 판단했다. 어차피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는 조카로서야 위증죄가 추가된들 별 의미가 없으나, 윤씨는 살인교사죄로부터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윤씨가 검찰의 이 판단에 불복해 낸 재정신청의 재판부도 18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윤씨의 마지막 몸부림도 헛되이 끝났다.

▦낡은 취재수첩에서 연락처를 찾아내 오랜만에 하양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대기업 임원을 거쳐 탄탄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그는 5년 전 강원 평창의 산골에 들어가 홀로 살고 있었다. "삶의 의욕이 사라져 세속을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8년을 하루같이 서울 집 딸의 방을 쓸고 닦으며, 또 살아 있듯 딸과 얘기하며 여전한 아픔을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자식 잃은 슬픔이 가장 참혹해 참척(慘慽)이라고 하던가. 그러니 위로도 부질없을 터다. 다만 쓸데없이 재연된 이번 재판으로 상처가 더 깊이 덧나지 않았기만을 바랄밖에.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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