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일이다. 시중에 붉은 색 염료가 동이 났다고 할 정도로 "Be the Reds" 티셔츠 한 장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광장과 광화문네거리를 빽빽이 채운 수많은 인파의 함성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하다. 시청과 광화문의 커다란 전광판 앞만이 아니었다. 호프집도 대형스크린이 없으면 장사가 안될 정도였다.
남아공 월드컵 중계 관심
당시 이런 광경을 본 국제축구연맹(FIFA)의 방송권판매 담당자가 방송권료를 추가로 요구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기존에 책정한 방송권료는 가정용 TV 시청자를 기준으로 한 것일 터이니 저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을 것이다. 처음에 농담으로 들었다가 FIFA측에서 광장에 나온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모인 사람들이 집에 TV가 없어서가 아니라 본래 모이기를 좋아하고 흥에 겨워하는 민족성 때문이라고 어렵게 설득했다는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고 한다.
스포츠 펍레스토랑에서 축구경기방송을 즐기는 영국 사람들을 두고 축구사랑이 지극하다느니 어쩌니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프리미어 리그 축구경기는 높은 요금을 내야하는 케이블방송에서만 중계하기 때문에 주급 생활자 입장에서는 맥주 한 잔 값이 더 싸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재미있는 축구경기를 재미없는 저작권으로 접근하는 논리에서 보면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남북협력 차원에서 우리가 받은 방송신호를 북한으로 송출할 때 FIFA가 추가금액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방송위원회와 통일부는 방송발전기금과 남북협력기금에서 절반씩 부담하였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시리아와의 평가전 중계방송권을 모 케이블방송이 단독으로 따냈는데 이전과 달리 지상파 3사에 재판매 하지 않아 축구에 목말라 있던 시청자들 앞에 지상파 방송사들의 체면이 구겨진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 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경인방송이 단독 중계하여 지상파 3사가 애를 먹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KBS는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경기의 중계권을 당초 계약에 없었다는 이유로 4강 경기부터는 MBC와 SBS에 재판매 하지 않아 결국 재판으로 문제가 풀렸던 전례도 있다.
이런 안 좋은 기억들이 SBS로 하여금 지상파 3사 간의 풀제를 깼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2016년까지 하계ㆍ동계 올림픽과 월드컵 방송권을 싹쓸이하는 강수를 두게 했을 것이다. 이후 이른바 "국민적 관심이 매우 큰 체육경기대회"에 대하여 재판매를 강제할 수 있도록 방송법을 개정한 것은 KBS와 MBC의 울분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KBS와 MBC는 이 조항을 근거로 방송분쟁 조정신청을 하였으나 결렬되었고 더 이상의 법정 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동계올림픽은 그런대로 넘어갈지 모르지만, 6월에 있을 남아공 월드컵은 도저히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
지상파 3사의 이중 잣대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상파 3사가 다른 쪽에서는 한데 똘똘 뭉쳐 케이블방송사를 상대로 저작권료를 내지 않으려거든 지상파 방송을 재송신하지 말라는 소송을 최근 제기하였다. 국민 대다수가 케이블을 통해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처분 신청은 기각되었지만 조만간 본안 소송에서 일합을 겨루도록 되어 있다.
올림픽경기를 독점 중계하는 것이 국민의 보편적 시청권을 해친다고 할 때는 방송의 공영성을 내세우고, 케이블방송의 재송신에 대해서는 방송을 중단하라는 가처분 신청까지 하면서 저작권을 내세워 어지럽다. 이래저래 2010년 2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방송사간의 총성 없는 전쟁은 밴쿠버 올림픽 못지않게 뜨겁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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