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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장애 화가 곽규섭씨, 마음의 창을 열고 '캐릭터로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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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장애 화가 곽규섭씨, 마음의 창을 열고 '캐릭터로 말해요'

입력
2010.02.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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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시간 동안 고작 서너 마디의 말만 입 밖으로 냈다. 대신 카페 곳곳에 걸린 그의 그림이 풍성한 얘기를 쏟아냈다. 벽면을 가득 채운 200여종의 캐릭터는 튤립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 꽃이나 호랑이 곰 강아지 등 동물을 닮았다. 사람의 팔과 다리를 지닌 녀석들은 저마다 이름도 있다. 예컨대 대머리에 민소매 차림의 녀석은 이름이 '아이고 춥다'다.

캐릭터는 살아 움직이기까지 한다. 튤립은 강아지에게 선물을 주고, 코스모스와 노래를 부르고 때때로 책도 읽는다. 녀석들은 이웃집을 오가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도 한다. 물론 그가 그린 그림 속에서. 캐릭터가 등장하는 각종 상황묘사는 수천 장이 넘는다. 그에게 캐릭터는 친구이자 자신이고, 그림 속 상황은 말 없이도 마음 놓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자폐장애 화가 곽규섭(22). 16일 그를 만났다. 생애 첫 미술전시회 '규섭과 200명의 친구들'을 연 자리였다. 엄마 김병진(49)씨가 말수가 적은 아들을 대신해 그간의 사연을 들려줬다.

1988년 엄마는 결혼 후 4년 만에 어렵사리 가진 아들이 천재인 줄 알았다. 갓 돌을 지난 아들은 눈과 손을 스친 문자와 숫자를 고스란히 발음하고 이해했다. 세 살 때 한문 옥편을 줄줄 외는가 하면 TV 광고에 나오는 영어단어도 몽땅 읽고 썼다.

엄마의 하늘이 무너진 건 93년 즈음이다. 대소변을 가릴 나이가 됐는데도 아들은 여전히 기저귀를 찼다. 말도 점차 어눌해지고 떼를 쓰는 일도 잦아졌다. 으레 나아질 줄 알았다. 무심코 튼 TV 프로그램에서 자폐아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황급히 병원을 찾았다. 자폐장애 진단이 나왔다. 그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 뒤 엄마는 아들을 들쳐 업고 사회복지관 문턱을 닳도록 넘었다. 수영 피아노 서예 바둑 제빵 등 모든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해서 경남 창원에서 대구, 서울로 이사도 했다.

아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지하철을 좋아하는 아들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으면 물정 모르는 이들이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앉느냐"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의 다리를 만지다가 종종 치한으로 오해 받기도 했다. 엄마는 "전염병 환자도 아닌데 사람들이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슬슬 피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가슴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 찾아서 해줬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 꼬박 한 달간 동네 골목골목을 헤매 피아노 교사를 찾아내는가 하면, 책을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동네 도서관도 매일 들렀다. 덕분에 아들은 매일 30분씩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한해 평균 700권에 달한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한차례 진통이 있었다. 3년간 다녔던 복지관의 장애청소년 주말 프로그램이 중단된 것. 엄마는 수소문 끝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명 교회에서 진행하는 장애인 프로그램을 기웃댔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2008년 교회의 초청강사로 온 조득수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를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다. 아들은 매주 3시간씩 진행된 조 교수의 애니메이션 수업을 한 차례도 거르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제자가 마음에 걸린 스승은 수업이 종료되자 그가 진행하는 또 다른 수업(노들장애인야학)으로 제자를 초대했다.

수많은 장애아 중에 규섭씨한테 유독 조 교수의 마음이 간 이유는 이렇다. "항상 종이에 메모를 하고 그림을 그리길래 노트를 봤더니 사고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어요. 규섭씨의 캐릭터들은 공식이 있고, 식물도감 등에서 특징만 잡아낸 거에요. 더구나 이야기가 있고요. 말없는 아이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엄마도 실은 알고 있었다. 휴지를 뜯는 장난을 못 치게 하면 아들은 휴지를 뜯고 있는 캐릭터와 이를 말리는 캐릭터를 그려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마구잡이로 그어 놓은 선인 줄 알았더니 색을 칠하고 나면 정확한 지하철 노선도가 완성되기도 했다. 엄마는 "아이가 무심코 낙서를 하는 게 아니라 말 대신 그림을 택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조 교수와 만난 뒤 규섭씨는 말수도 늘었다. 단답형 대답만 했는데 조금씩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남들이 자신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밤새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아가 조 교수는 깜깜했던 규섭씨만의 세계에 화려한 조명을 비췄다. 조 교수가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예술단체인 '로사이드'(rawsiders.egloos.com)가 규섭씨의 캐릭터 200여종을 동영상으로 제작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조 교수는 "아이를 병적으로 바라보면 항상 똑같은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예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이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에 열게 된 미술전시링?비슷한 맥락이다.

엄마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규섭씨는 한자 호(虎)로 그린 멋진 호랑이 그림을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20일(오전 9시~오후 11시)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카페 '히비'를 찾으면 규섭씨가 그리는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돈은 필요 없다. 규섭이를 이해하려는 넉넉한 마음만 품고 오면 된다. 문의 010-3805-3144(로사이드)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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