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애 처음으로 만난 공연 단체는 지방을 떠도는 곡마단이었습니다. 열 살쯤 때의 기억이므로 1960년대 전반이었을 것입니다. 부산 초량 제4부두 근처 자갈마당에 가설 천막극장이 섰는데, 남루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규모는 대단했지요. 공중그네타기가 아찔한 느낌으로 전개될 정도였으므로 천정 높이는 10m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객석도 계단식으로 1,000석은 족히 넘어 보였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그물이 쳐져 있었는데 그 바로 위로 아찔한 그네가 공중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곡마단 공연은 노래로 시작됩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남자 가수는 노래는 잘 부르는데 농사꾼처럼 생겨서 큰 박수를 받지 못했고, 두 번째 나온 여가수는 화려한 의상을 입었는데 짙게 칠한 분장 사이로 주름살이 깊게 패여서 더 늙어 보였습니다.
극장 입구에서 오뎅을 팔았던 뚱뚱한 아주머니도 노래를 불렀고, 트럼펫을 불던 아저씨도 노래를 불렀지요. 내 나이 또래의 소녀도 나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수준은 형편없었지만 예뻐 보였습니다. 이윽고 약간 이름이 있는 가수가 이제 막 도착했다면서 헐떡이며 무대에 나타나 연거푸 노래 세곡을 부르고 사라졌습니다.
이제 동물 곡예나 공중 그네타기를 하려나 생각했는데, 2부는 연극이었습니다. 뚱뚱하고 못생긴 아주머니, 비쩍 마른 중년 사내, 분장이 짙어서 더 늙어 보이는 여가수가 이제는 배우로 등장했습니다. 새로 등장한 젊은 남녀 배우가 주연이었는데, 오히려 주연배우보다 겹치기로 출연한 아주머니 중년 사내 늙은 여가수의 연기가 훨씬 더 실감났지요.
그리고 노래 실력이 형편없던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이제는 배우로 등장합니다. 아, 저 애는 원래 배우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대사 한 두 마디 하고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연기도 못하면서 예쁘게만 보여서 은근히 짜증이 났지요. 그러나 희고 갸름한 얼굴에 눈을 내리깔고 앉은 소녀를 보면서 나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연극은 오히려 노래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젊은 주연배우는 소리를 꽥꽥 질러대어서 대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못생긴 아주머니는 정말 웃기는 재주가 있었고, 입구에서 트럼펫을 불던 아저씨도 능청스럽게 악역을 소화해 내고 있었지요. 늙은 여가수는 극중에서 병들어 죽어가면서 우리를 울게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종이 눈이 내렸고, 늙은 여배우의 높은 음역의 비극연기는 분명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기다리던 공중 곡예의 시간이 왔다는 장내 방송이 이어지고 공중에서 그네가 툭, 떨어져 흔들립니다. 아, 저게 누구야? 그렇게 연기를 못해서 내게 짜증을 유발시켰던 젊은 남녀 주인공이 그네를 탑니다. 우와- 하는 함성과 함께 공중에서 날아간 남녀배우가 서로 줄을 바꿔 타는 묘기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절정의 시간은 그 다음입니다. 노래도 잘 못 부르고 연기도 잘 못하면서 계속 무대에 들락거렸던 그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줄을 타러 등장합니다. 그 순간 모두 숨을 죽이고, 어린 소녀 곡예사는 관객의 숨죽인 호기심 위를 거침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관객들의 탄성과 박수가 잇달아 터지고 소녀 곡예사의 비행은 점점 난이도를 높여 갑니다. 나는 잔인한 상상과 참을 수 연민 사이에서 오줌을 찔끔거립니다.
소녀의 마지막 곡예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남자 곡예사와 공중에서 자리를 맞바꾸는 묘기라는 장내 방송이 이어집니다. 객석은 숙연해지고, 한 마리 새처럼 공중에 날아 오른 소녀가 맞은 편 그네를 타고 오를 때, 가설 천막극장은 우리를 황홀경에 빠뜨립니다. 그렇게 남루해 보이던 천막극장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상의 궁전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초라해 보이던 곡마단 사람들이 아름다운 전사(戰士)들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동물 곡예입니다. 먼저 조랑말이 나와 두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재롱을 떱니다. 원숭이가 비쩍 마른 아저씨 등을 타 넘어 다니고, 아, 비둘기 서너 마리가 공중 높이 날아가 한 바퀴 선회하고는 곡예사에게 무사히 돌아옵니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집니다. 이어서 염소 세 마리가 난데없이 등장하여 뚱뚱한 아주머니의 호령에 따라 줄 맞춰 뛰어 다니고, 원숭이가 큰 공을 타다가 넘어지고,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립니다. 이 모든 장면이 마지막에는 동시 진행 됩니다. 사람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노는 것이지요.
피날레는 역시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장식합니다. 동물 곡예가 절정에 이를 때쯤 그녀가 객석에 등장하여 사진을 팔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공중 곡예 사진입니다. 나는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 예쁜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사진을 내밀 때 나는 몸을 떱니다. 돈을 주고 사진을 받는 그 순간 슬쩍 스치는 그녀의 감촉에 열 살 소년은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나는 그날 이후 거의 매일 가설 천막극장을 드나들었습니다. 특히 공연을 시작하기 한 시간 전쯤 천막 뒤로 돌아가 소녀를 훔쳐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요. 그러나 어느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보니 자갈마당은 깨끗이 비어있었고, 천막 극장은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며칠간의 나날이 한바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연극쟁이 인생은 그 꿈을 좇아온 시간이었던가….
나는 그 시절의 황홀했던 기억을 40여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재현해 냅니다. 2005년, 내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지금까지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동춘 서커스와 만나 '곡예사의 첫사랑'이란 이색적인 공연을 시도합니다.
명색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곡마단 연극을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시절 곡마단이야말로 세 살 먹은 어린애부터 팔순 관객에 이르기까지 함께 어울렸던 진정한 대중극단이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 연출가 칸토르는 말합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연극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건 유랑극단 형태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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