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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영화제서 용호상 받은 '회오리 바람' 장건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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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영화제서 용호상 받은 '회오리 바람' 장건재 감독

입력
2010.02.1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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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교 시절은 바람 잘 날 없었다. 학교 수업은 밥 먹듯 빼먹었다. 아르바이트에만 정신이 팔려 중국집에서 주방 보조가 되기 전까지 1년 가량, 그리고 치킨집과 횟집 배달 일도 마다하지 않은 '배달의 기수'였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년마다 근신과 정학을 맞아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고2 가을이 되니 "내 인생에서 역전이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패배감에 젖어들어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세월아 네월아 빨리 가라, 졸업하고 돈이나 빨리 벌자는 생각뿐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거센 방황의 회오리 바람에 휩싸인 한 남자 고교생의 힘겨운 삶을 그린 독립영화 '회오리 바람'은 장건재(33) 감독의 학창시절과 오버랩된다. 지난 12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 감독은 "내 10대는 훨씬 우울하고 못난 시절이었는데 영화 속에선 아름답게 나온 듯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회오리 바람'의 고교생 태훈(서준영)은 여자친구 미정(이민지)과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뒤 곤경에 처한다. 미정의 부모가 둘의 은밀한 관계를 추궁하고 결국 만남을 금지시킨다. 사랑에 대한 열망은 더욱 뜨거워지고, 태훈의 방황은 깊어만 간다. 무늬만 학생인 태훈은 사랑을 위해 경제적 독립을 꿈꾸며 아르바이트에 열중하지만 그를 둘러싼 사회적 벽은 높기만 하다. 가정과 학교와 불화하는 태훈의 모습은 사회가 정한 '범생의 기준'에 턱도 없이 못 미치는 이 시대 많은 10대들의 고민과 방황을 대변한다. 카메라는 태훈의 힘겨운 삶을 묵묵히 지켜보며 청춘의 고독을 필름에 돋을새김한다. 가슴 한 켠에 스산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래서 더 꼭 안아주고 싶어지는 영화다.

장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회오리 바람'은 지난해 제28회 밴쿠버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영화로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감독 홍상수ㆍ1996년), '초록물고기'(감독 이창동ㆍ1997년)에 이어 세 번째로 용호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와 홍콩영화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영화제 등의 초청장도 받았다. 장 감독은 "여자를 만나면 손잡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가슴 만지고 싶어했던, 치기 어린 그 시절의 사연을 내 첫 장편으로 꼭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속 태훈처럼 고교시절에 공부와 담을 쌓았던 장 감독은 고2 때 영화라는 인생의 돌파구를 찾았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고전ㆍ예술영화를 비디오로 상영해주던 문화학교서울을 찾으면서부터다. "빈둥빈둥 놀던 때,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대학생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지적인 자극을 받았고, 막연하게나마 영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1년에 500편 이상 필사적으로 영화를 봤고 공부를 했다. 12군데나 떨어지고 턱걸이로 대학에 들어간 뒤엔 온 힘을 다해 영화를 만들었다."

모든 독립영화의 운명처럼 '회오리 바람'의 제작도 수월치 않았다. 제작비는 1억원. 영화진흥위원회 등 공공기관이 7,000만원가량을 지원해줬고, 나머지는 장 감독이 아르바이트 등으로 번 돈으로 채워졌다. 장 감독은 제작과 각본, 편집까지 도맡았고, 부인 김우리씨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그래도 돈이 없어 2008년 1월 촬영을 시작하고도 지난해 8월에야 겨우 영화를 완성했다. "빼서 제작비로 쓸 전세금조차 없었다. '내가 정말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항상 앞섰다. '생활의 기름기'를 줄이며 영화에 올인했다. 버스 세 정거장 이하 거리는 걸어다니고 절대 택시는 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버텼다."

영화 속에선 딸의 연애에 격분한 미정의 아버지가 태훈과 그의 부모를 불러놓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장 감독이 실제 겪은 에피소드다. 부모의 아픈 기억을 헤집는 것일수도 있다. 역시나 "부모님은 영화를 보고 속상해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영화가 여러 해외 영화제의 초청을 받고, 개봉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뿌듯해 하신다"고 그는 말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직업을 구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감독이 직업이 됐구나, 생각하시는 듯하다.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린 게 가장 기쁘다." 영화는 25일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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