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 연휴를 코 앞에 둔 12일 오후 9시께.
이미 귀성전쟁이 시작됐다지만 1년 365일 쉼 없이 쇳물을 뽑아내야 하는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용광로 전사들'에게 설은 딴 세상 얘기인 듯했다.
연간 500만톤의 쇳물을 생산해내는 제4고로를 찾았다. 고로의 크기는 세계 6번째지만 생산량은 세계 1위이다.
직원들의 자부심이 한껏 드러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다.
바닷바람이 꽤 차가운데다 눈발까지 날리던 터라 한시라도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수 차례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야 출입이 허용될 만큼 보안도 철저하다.
먼저 찾은 곳은 운전실. 용광로 안팎의 상황을 보여주는 폐쇄회로(CC)TV 화면만 80개가 넘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치와 그래프가 빼곡히 담겨 있는 컴퓨터 모니터도 10여대다. 입사 23년차인 황병진 반장을 비롯한 근무자 5명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묻어난다. 공정의 특성상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운전실에서 방열복과 안전모를 착용한 뒤 용광로 쪽으로 갔다. 3층 높이의 4고로에는 쇳물이 빠져 나오는 통로인 출선구가 4개 있는데 2개씩 번갈아 가며 쇳물을 받아낸다. 섭씨 1,520도의 쇳물을 뽑아내는 출선 작업 때는 주변의 온도도 섭씨 300도가 넘어간다고 한다. 운전실을 나설 때는 꽤 추웠는데 어느 새 땀이 나기 시작했다.
23년차 베테랑인 홍재헌 반장이 마중을 나왔다. 4명의 반원은 간이 사무실과 주상(쇳물이 나오는 구역)을 부지런히 오간다. 홍 반장은 "대부분의 설비가 자동화한 덕에 일하기는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에선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있을 이유가 없다"며 농을 건넸다.
하지만 출선구를 막고 뚫는 과정에는 천상 사람 손이 간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방열복을 착용하고 출선구 바로 앞까지 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한다. 10m 넘어까지 튀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 밑 두꺼운 철판 아래로 쇳물이 흘러간다더니 생고무로 된 사진기자의 신발 밑창이 조금 녹아 내렸다.
현재 광양제철소에서 가동중인 고로는 5개. 각 고로마다 운전실을 지키는 조로반과 출선작업을 담당하는 노전반이 24시간 근무한다. 쇳물을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제강공장과 열연공장 등도 역시 24시간 내내 돌아간다. 철광석 등 원료 하역에서부터 완제품 수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공정이 4조3교대로 운영된다. 결국 설 연휴를 잊고 근무하는 인원은 3,000명이 넘는 셈이다.
대구 출신인 홍 반장에게 명절 얘기를 꺼냈더니 "아쉬움이야 있지만 보람과 긍지가 훨씬 크다"고 하더니 "장남 아닌 게 천만다행이고 고향 잊은 지 오래됐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황병진 반장은 "이 곳엔 계절도 없고 연휴는 더더욱 없다"면서 "모두가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오후 11시30분께 광양제철소 정문을 나섰다. 남들은 꿀맛 같은 사흘간의 연휴를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여의도의 5.5배가 넘는다는 광양제철소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쇳물을 벗 삼아 '제철보국'하는 산업역군들은 설 연휴도 잊은 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광양=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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