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은 정말 신기한 날이었다.
범골은 40호에, 한 집당 대여섯씩이니, 근 이백 명 사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이면 저어기 면소재지 쪽에서부터 뭐라도 한둘씩 든 낯선 이들이 끊이지 않고 마을로 들어와서는, 한 집당 두세 명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특별히 집이 큰 것도 아닌데, '큰집'이라 불리는 집은 열 명, 스무 명씩 늘어나기도 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은 먼 대도시에서 콩나물 기차와 시루떡 버스를 타고 왔다는데, 어른이고 애고 간에 때깔이 났다.
내가 늘 보고 사는 이들이 까마귀라면 그들은 까치였다. 까마귀들과 까치들은 밤새 전기 아까운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
예전 설날은 부산스러웠다. 집집의 남자들이 죄다 나와서 산기슭의 무덤에다 절을 하고는 윷놀이다 술판이다 해서 종일 온동네가 떠나가라 시끄러웠다.
농사꾼 동네라 원래도 꼭두새벽 기상이지만, 설날은 온 동네가 단체 기상해서는 부산스러웠다. 차례라는 걸 지내고, 어른은 돈 주고 애들은 돈 받는 세배라는 걸 했다.
또 집집의 남자들이 죄 나와서는 산기슭의 무덤에다 절하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윷놀이다 널뛰기다 제기차기나 술판이다 뭐다 해서 종일 온 동네가 떠나가라, 어젯밤보다 더 떠나가라, 시끄러웠다.
특히 나랑 동갑인 열두 아가들은 지들 세상 만난 것처럼 먹을 것 하나씩 쥐고 팽이처럼 돌아다녔다. 나는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사람들 노는 걸 구경했다.
나는 사람도 아니면서 덩달아 흥이 났다. 저녁때가 되면 그 많던 낯선 이들이 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들을 배웅하는 범골 늙은이들은 갑자기 10년은 늙어 보였다.
나는 새마을운동이 힘차게 시작되었던 1971년에 태어났다. 나랑 같이 태어난 범골의 열두 아가들은 두어 살 때까지, 암컷은 까아악 끽 까아악 끽, 수컷은 꼬오옥 옥 꼬오옥 옥, 그저 울어대는 까치와 별다를 바 없는 한심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성숙했다. 40년을 살고도 큰 발전이 없는 게 문제지만. 나는 범골의 '남녀노소 장삼이사'와 더불어 살면서, 빠른 속도로 '사람'을 배워갔다. 그러나 겪어보니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였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었다. 하여 사람공부가 더디 늘었고, 그 핏덩이 열두 아가들이 설날이면 떡국을 몇 사발씩 퍼먹기를 십몇 년 거듭한 끝에 청소년이란 게 되어서는, 방황인지 반항인지 하느라고 지 부모들 속 되우 긁어댈 무렵에야, 비로소 인간들의 '설날'에 대해서 좀 알만하게 되었다.
초꼬슴엔 '눈 설(雪)'자 쓰는 '설'날인 줄 알았는데 터무니없는 추측이었고, '차례 서(序)'자를 '처음 서'자로 잘못 알아, '서+ㄹ+날', 처음날이라는 거잖아, 뭐, 한 해의 첫날이니 그토록 요란하게 시작할 만하네,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인간들은 우리 도깨비처럼 단순하지가 않았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단다. 1번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비롯되었다. 이때의 '설'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나.
2번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왔다.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니 '개시하는 날'이라는 건데, 이 '선날'이 연음화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3번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왔다. 조심하다 보니 'ㅂ'이 도망가버렸다는 건가? 내가 4번을 추가해본다.
1번 2번 3번 이유가 뒤섞여서. 그래도 하나만 고르라면 난 당연히 2번이다. '개시하는 날', 나의 견해인 '처음날'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내 동갑내기 열두 녀석도 스무 살이 되자 몽땅 떠나버렸다. 그들의 삼촌 사촌 형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기가 무섭게 대개 공장으로 떠나갔지만, 녀석들은 고등학교까지 다 마치고 대학으로 반, 대학이 아닌 곳으로 반, 떠나갔다.
녀석들은 설날이 되면 술판을 벌이다가 회포를 덜 풀었는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대학에 가고 안 가고 차이가 상당한 듯했다.
녀석들만 떠난 게 아니었다. 농촌에 땅 파서는 자식새끼 못 가르친다, 남부여대로 여러 집이 도시로 떠나갔다. 그들은 설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와도 밤늦게 와서 성묘 끝내기 무섭게 돌아갔다. 둘도 많고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세상이 된 데다가, 시골로 시집오는 대견한 여인도 드물어 노총각은 늘어나고 아이는 점점 태어나지 않으니, 설날에 성묘길 따라다니며 허우적대는 꼬맹이도, 세뱃돈 적다고 징징대는 꼬맹이도 줄어갔다.
알고 보니 설날이 참 고생이 많았다. 구한말 1895년에 양력이 채택되면서 고생이 시작되었다. 양력 설날 '신정'이 생기면서, '구정'으로 전락한 것도 서러운데, 일제시대부터는 구정에 설 쇤다고 공공연히 핍박聆杉?
이승만은 그렇다 치고, 4H정신-Head(과학적이고 창조적 두뇌), Heart(성실하고 따뜻한 마음), Hand(슬기롭게 일하는 손), Health(역동적 건강)으로 무장되어 있던 농촌 청년에게, 새마을운동 3대 정신(근면, 자조, 협동)까지 불어넣어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통일벼'로 쌀밥 먹게 해준, 그리하여 그가 죽었을 때 진정으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그때 그분 박정희 대통령마저도 '구정'을 끈질기게 갈궜다. 일본군 장교 출신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구정'을 지켜냈고, 웬만한 것에다 '민속의'를 붙이기 좋아하던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 받았다. 마
침내 1999년에는 '설'을 되찾아, 설날로 복권했다. 사흘간 연휴를 받아 민족 최고의 명절에 준하는 대우도 받게 되었다. 실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잽도 안 되는 '백년 동안의 사수' 끝에 얻어낸 승리였다.
이젠 범골도 늙은이 혼자나 둘이서만 사는 집이 태반이 되었다. 자식들은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돌아간다. 한마디로 설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
나는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노래만 들으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까치설날이 왜 어저께냐고! 뭐, 이젠 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렇다.
옛날 아이들은 섣달 그믐날, 설날의 전날을 '작은 설' 혹은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불렀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이다. '아치설' '아찬설'에 'ㄱ'이 첨가 된소리되기로 '까치설'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윤극영 선생이 1927년 '까치 까치 설날은'이라는 동요를 만들었고, 그 노래가 무지무지하게 사랑받음으로써 까치는 뜬금없이 설날을 갖게 되었다. 내 생각엔 까치라는 놈들도 자기들 설날이 있다는 걸 아는 듯하다.
내가 사는 곳은 옛날 성황당 자리에 있는 백 년 묵은 소나무인데, 섣달 그믐이면 까치들이 나뭇가지에 솔방울처럼 매달려서는 왕창 울어대는 것이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범골도 늙은이 혼자나 둘이서만 사는 집이 태반이 되었다. 애 울음소리 듣기가 점점 힘들어져 간다. 청소년은 어쩌다 볼 수 있지만, 이삼십대 청년은 정말 보기 힘들다. 설날이나 되어야, 세대를 골고루 볼 수 있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한 지도 20여 년이 되어간다. 설날이면 한 집당 차가 서너 대씩 서 있다. 성묘도 차를 타고 다닌다. 심지어 차량 정체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차는 빠르다.
자식들은, 친척들은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돌아간다. 며느리가 아들 끌고 금방 올라가 버려서 울가망해진 늙은 부모들이, 딸이 사위 끌고 금방 와서 환해진다.
설날을 불알친구 회맹하는 날로 알던 내 동갑나기 녀석들은 서른 넘으니 서로 만나지도 않는다. 간만에 보는 가족과 어울리기도 바쁜데 친구 찾을 겨를이 없긴 하겠다.
옛날엔 '설날'이라는 말만 들어도 들썩들썩했는데, 이천년대 들어서는 좀체 달뜨지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설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긴다. 설날마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도깨비라고 해서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여럿이 얼려서 즐겁게 노닐면 신나고, 왕따 당하듯 홀로 심심하면 스트레스 받는 것이다. 마흔 된 도깨비, 칠순 팔순 노인네들 심정과 별 다를 바 없다. 설날, 못 봤던 녀석들 보고 싶다.
인간들이 차례, 세배, 성묘라는 수백 년 간 전해 내려온 행위를 존재의 증명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하지만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나는 재미있다. 전통인지 관습인지 하는 그것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기들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게 아주 조금씩 형식을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백여 년에 걸친 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되찾은 설날이다.
설날은 가장 질기게 오래 갈 인간들의 관습일 테다. 범골 인간들의 오랜 친구, 나 도깨비도 설날을 사랑한다. 설날이 없어질 때까지는.
김종광 약력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
▦소설집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화사> , 중편 <71년생 다인이>, 장편 <율려낙원국> <첫경험> 등 첫경험> 율려낙원국> 낙서문화사> 모내기>
▦신동엽창작기금 수상
김종광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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