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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잊혀져 가는 명절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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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잊혀져 가는 명절 세시풍속

입력
2010.02.1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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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은 쫓고 복은 부르고" 조상들 지혜 숨어 있었네

정월 첫날은 설, 섣달 그믐은 작은설이라 했다.

옛 사람들에게 설은 사실 섣달 그믐 밤부터였다. 낯선 새해를 맞기 전 묵은 해를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주신 스승과 친지를 찾아 절을 하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정월 바로 전날 하는 이 인사를 묵은 세배라 불렀다.

설에 고향 찾기도 바쁜 요즘 세상에 묵은 세배까지 챙기는 집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명절의 옛 세시풍속들은 그렇게 점점 잊혀지고 있다.

해마다 10월 마지막 날이면 해괴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무리 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서양 사람들의 모습이 TV에 비친다. 할로윈 못지 않게 재미 있고 뜻 깊은 우리 고유의 명절 세시풍속을 짚어 본다.

섣달 그믐·설… 묵은 세배와 복조리

4대 명절 중 절반이 정월에 든다. 설과 대보름이다. 설에는 가족 공동체, 대보름에는 마을 공동체 중심의 세시풍속이 많았다. 섣달 그믐 작은설에 사당제라고 해서 따로 차례를 지내는 집도 있었다.

강원도에선 작은설 차례상엔 특별히 만두를 올렸다. 옛 사람들은 새해를 경건히 맞는 것만큼 묵은 해를 겸허히 정리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강원도 강릉에선 설 이튿날 촌장 집에 모여 다과상을 차려 놓고 합동세배를 한다.

도배식이라 불리는 이 풍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촌장에게 세배를 하면 촌장은 답례로 "건강하고 소원성취하라"며 덕담을 한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섣달 그믐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복조리 장수가 돌아다녔다. "복조리 왔어요"란 소리가 들리면 집집마다 자다 일어나 부랴부랴 사다 달았다.

조리가 쌀을 이는 것처럼 복도 일어다 준다고 믿었다. 설에 도화서(그림을 담당한 조선시대 관청)에선 세화(歲畵)를 그렸다. 액을 쫓는 신을 그린 이 그림을 임금은 대궐 문 양쪽에 붙였다. 요즘도 정초가 되면 지방에선 대문에 '용'이나 '호' 같은 글자를 써 붙이는 집이 있다. 이게 바로 세화의 흔적이다.

정초 여성들은 부정 탄다 해서 바깥 출입을 못했다. 친정에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해 자기 대신 예쁘거나 똑똑한 노비를 문안비로 뽑아 보냈다.

문안비가 된 노비는 복이 넝쿨째 굴러온 셈. 새로 맞춘 설빔을 입고 안주인의 친정에서 세배상과 세뱃돈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정월 열닷새, 대보름… 두레기싸움과 용알뜨기

정월 보름달이 뜨면 마을 두레패는 농악대를 앞세워 농사기구 대신 두레깃발을 들고 나섰다. 옛 농촌에선 마을마다 서열이 있었다. 두 마을의 두레패가 만나면 동생마을은 기를 내리고 형님마을 두레패에 인사를 했다.

서열이 분명치 않은 마을끼리 만나면 실랑이가 붙었다. 깃발 꼭대기에 붙어 있는 꿩 털을 먼저 빼낸 쪽이 승리. 진 두레패는 다음 명절부턴 꼼짝없이 동생마을이 됐다.

마을 안에선 백성들이 잘 사는 집 마당에 숨어 들어가 몰래 흙을 훔쳤다. 이른바 복토(福土)였다. 복토를 부뚜막에 바르면 잘 사는 집으로 갈 복이 자기 집으로 온다고 믿었다.

백성들은 또 대보름에 김치를 먹으면 쐐기풀에 온몸이 쏘인다고, 특히 백김치를 먹으면 머리가 흰다고 믿었다. 찬 물을 마시면 여름 내 더위를 먹는다고 여겼다.

대보름 전날이면 온 마을이 부지런해졌다. 모든 일을 9번씩 했다. 나무를 9짐 하고, 새끼를 9발 꼬고, 빨래를 9가지 했고, 글을 9번 썼다.

9는 한 자리 숫자 중 최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여인들은 대보름 전날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우물물을 떠다 부엌신인 조왕신에게 바쳤다. 용알뜨기라 불렸던 이 풍속은 상하수도가 갖춰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오월 닷새, 단오… 단오선과 애호

'하선동력(夏扇冬曆)'이란 말이 있다. 단오(여름) 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부채(단오선)를 선물하고 동지(겨울) 땐 나라에서 달력을 만들어 백성에게 배포했던 풍속을 이른다.

옛 임금은 단오가 되면 공조에 부채를 만들라 명하고, 이를 벼슬아치들에게 나눠줬다. 연말에 기관이나 기업에서 달력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하선동력의 흔적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의 장장식 연구관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교육과정이 서구식으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세시풍속이 낡은 구습이라는 편견이 생겨 안타깝다"며 "하선동력 같은 건 현대에도 살려봄 직한 풍속"이라고 말했다.

금기나 주의가 많은 설이나 대보름과 달리 단오에는 적극적으로 권하는 주술적 풍속이 대부분이다. 5를 양기가 왕성한 숫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단옷날 부적은 잡귀와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특히 쑥을 호랑이 모양으로 엮어 비단 조각을 꽂아 나풀거리게 해 대문에 붙여 놓았다. 이 애호(艾虎)에는 호랑이의 힘을 빌려 액을 쫓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상도에선 지금도 할머니들이 단옷날 액운을 물리치려고 궁궁이풀 잎이나 뿌리를 머리에 꽂는다.

창포를 뜯어다 삶은 물?머리를 감고 뿌리에 붉은 칠을 해 머리에 꽂는 풍속 역시 잡귀를 물리친다고 여겼다. 이는 지역축제 형식으로 요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팔월 열닷새, 추석… 반보기와 올게심니

옛 며느리들은 농사일과 집안일이 워낙 바쁜 데다 외출도 자유롭지 못해 친정 식구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농사일이 얼추 마무리되는 추석 전, 며느리는 친정에 연통해 반보기(중로상봉ㆍ中路相逢) 날짜와 장소를 정했다.

시댁과 친정 사이 거리가 머니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오랜만에 나들이도 하고 그리운 친정 식구도 만나는 반보기를 며느리는 손꼽아 기다렸을 터다.

추석에 전라도에선 벼가 완전히 여물기 전에 조금 일찍 수확해 찌거나 볶는 올게심니를 했다. 이를 차례상에 올리고, 남은 벼 포기는 집에 걸어뒀다.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경상도에선 풋바심이라고도 불렀다.

황해도와 경기도에선 거북놀이와 소놀이로 풍년을 기원했다. 짚과 가마니로 거북이나 소의 탈을 만들어 여러 명이 뒤집어 쓰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한바탕 놀았다. 거북과 소를 맞은 집에선 음식이나 돈을 대접했다.

추석 전날 동네 아이들은 발가벗은 채 밭고랑을 나이 수만큼 기어 다녔다. 그래야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농사도 잘 된다고 여겼다.

어른들은 날씨로 농사 점을 쳤다. 추석에 비가 오면 이듬해 보리농사가 흉작이고, 구름이 끼어 달이 안 보이면 토끼가 새끼를 못 밴다고 믿었다. 구름이 적당히 벌어져 있어야 풍년이 든다고 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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