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뒤면 2010 남아공 월드컵의 막이 오른다.
지난 12월 공인구 '자블라니'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전 세계 축구팬들은 한층 들떴다. 올해는 스타 선수들의 화려한 골 세리머니를 더욱 많이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다. 월드컵 공인구는 골키퍼보다는 공격수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둥글게, 더 둥글게
축구공은 둥글지 않다. 최대한 둥글게 만드는 것이다. 자블라니는 역대 공인구 가운데 가장 구형에 가깝다. 공을 만들 때 이어 붙이는 조각이 8개로 가장 적기 때문이다.
조각 수를 처음 줄인 공인구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의 '팀가이스트'. 그 전까지 32개였던 조각이 14개로 확 감소했다. 다각형으로 제한돼 있던 모양을 트로피와 부메랑을 본뜨는 등 다양하게 바꾼 덕분이다.
팀가이스트는 조각 3개가 만나는 지점이 기존 공인구의 60곳에서 24곳으로, 조각끼리 닿는 선의 길이가 40.05cm에서 33.93cm로 줄었다. 울퉁불퉁한 정도도 그만큼 줄었다.
2002년 한반도를 달군 '피버노바'까지 공인구는 모두 정육각형 조각 20개 사이사이에 정오각형 조각 12개를 이어 만들었다.
기하학적으로 분명 다면체다. 꼭지점(60개)과 면(32개)을 합하면 모서리(90개)에 2를 더한 수와 일치한다는 다면체의 '오일러 법칙'도 만족한다.
공인구가 다면체에서 점점 구형으로 진화한 이유는 슈팅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빠르게 움직이는 공 주변에선 공기의 소용돌이가 형성된다. 이땐 공기와의 마찰력이 적어 멀리 날아갈 수 있지만 그만큼 정확도가 떨어진다.
공의 크기가 작고 표면이 울퉁불퉁할수록, 날씨가 맑을수록 낮은 속도에서도 소용돌이가 형성된다는 게 물리학자들의 설명이다. 반대로 느리게 움직이는 공에는 상대적으로 마찰력이 크게 작용한다. 회전하는 공은 휘어진다.
공의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물리학적 불규칙성은 구형에 가까울수록 현저히 줄어든다. 외부 환경이나 충격에 대한 반응이 일정해지기 때문이다.
자블라니는 한술 더 떠 조각들을 기존 공인구 같은 평면이 아니라 곡면으로 만들었다. 완벽하게 둥근 공은 어느 부분에서 지름을 측정해도 같아야 한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공인구의 가장 큰 지름과 작은 지름의 차이를 1.5%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자블라니는 이 차이가 1.0%로 역대 공인구 가운데 가장 작다.
중거리슛의 성공 비결
조각 수가 준 팀가이스트부터 자연스럽게 제작 방식도 변했다. 그 전에는 다각형 조각을 일일이 꿰매 붙였지만, 팀가이스트는 고온고압 환경에서 본드로 접착했다. 이는 탄력을 높이는 효과를 냈다.
피버노바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공인구 '트리콜로'는 조각 소재에 공기방울을 넣었다. '신택틱 폼'이라고 불리는 이 소재는 액체 상태의 폴리우레탄에 가스를 주입해 말린 고체다.
가스가 주입될 때 미량의 공기가 함께 들어가 고압의 방울 형태로 남는다. 이 공기방울은 공의 탄력뿐 아니라 반발력과 속도까지 향상시켰다.
탄력과 반발력이 좋다고 무턱대고 튀어 올라선 곤란하다. 높이 2m에서 10번 떨어뜨렸을 때 가장 높이 튄 지점과 낮게 튄 지점의 차이가 10cm를 넘으면 안 된다는 게 FIFA 공인구의 규정이다.
팀가이스트는 2cm를 기록했다. 정확도와 탄력이 어우러진 덕분인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유난히 중거리슛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미세 돌기, 약인가 독인가
축구공의 정확도가 높아지면 골키퍼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다. 자블라니에는 골키퍼를 위한 묘책이 숨어 있다. 자세히 보면 표면에 오톨도톨하게 미세한 돌기가 돋아 있다.
유로2008의 공인구 '유로패스'에 처음 등장한 이 돌기의 기능은 미끄럼 방지. 날아오는 공을 놓치지 않고 잘 잡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회전력을 높인다는 점에선 골키퍼에게 불리하기도 하다.
월드컵 공인구는 회를 거듭할수록 정밀해지고 있다. 과학을 모르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공을 마음대로 컨트롤하기 어려워졌다. '똑똑한' 플레이가 필요한 이유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 공인구의 역사
1998년 이후 월드컵 공인구 제작기술이 공격 축구를 지향해왔다면 그 이전엔 소재와 속도, 방수성능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94년 미국 월드컵의 '퀘스트라'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에투르스코 유니코'는 조각 소재에 처음으로 폴리우레탄을 썼다. 신축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이 합성소재로 만든 공인구는 치열한 공 쟁탈전에서 한층 더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였다.
합성소재로 만든 최초의 공인구는 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아즈테카'. 당시 습한 고지대 기후에서도 뛰어난 탄력과 반발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이 물에 젖으면 반발력이 줄면서 움직임이 둔해진다.
70년 멕시코 월드컵의 '델스타'는 32개의 천연가죽 조각을 이어 붙였다. 당시로선 구형을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아이디어였다. 축구공 하면 떠오르는 검정색 오각형 무늬도 델스타에 처음 등장했다.
델스타 이전엔 공인구가 없었다. 출전 선수들이 각자 자기 나라 공을 쓰겠다며 신경전을 벌이다 전·후반 다른 공을 쓰기도 했다. 이에 FIFA는 70년부터 공인구로만 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새 축구공이 공인구가 되려면 기계로 수만 번을 차이고 수천 번 고압에 견디며 수백 시간 물에 잠기는 등 혹독한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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