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4·19 50년을 말한다] <3> 나는 왜 휴머니스트인가-정옥자 국사편찬委 위원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4·19 50년을 말한다] <3> 나는 왜 휴머니스트인가-정옥자 국사편찬委 위원장

입력
2010.02.11 00:10
0 0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1960년 봄 나는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던 동덕여고 3학년생이었다. 아침조회 때마다 조동식 교장 선생님의 "옛 성현의 말씀에…"로 시작되는 훈화는 발랄한 여고생에겐 좀 따분했으련만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옛 성현이 공자를 지칭한 것이었고 그 내용이 '논어'의 한 구절을 풀어 설명하신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래 그런지 선생님들도 툭하면 "공부만 잘하면 무엇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셨다. 대학 입학률로 학교 등급을 따지는 치열한 경쟁에서 약간 비켜선 듯싶은 학교였다.

그 즐겁던 여고 시절은 4ㆍ19로 산산조각이 났다. 학생회장이 된 것이 화근이었다. 동덕여고는 동대문 밖에 있어서 고려대 관할이었던 듯 고려대 학생회장이 관리하였다. 5월부터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회의에 불려 다녔다. 그들에겐 여고생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 같다.

정작 괴로운 일은 학교 내부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의 요구가 물밀듯이 학생회를 통하여 분출하였다. 그 요구도 각양각색이어서 지금은 일일이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요구 중에서 감정이 섞였다고 판단되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회의를 통해 걸러내고 학교 측에 전달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 내 학생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나는 어느덧 호랑이 등에 올라 타고 있어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강경하던 학생회 간부들은 대학 입시라는 눈 앞의 거대한 벽 앞에서 모두 맥없이 무너졌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사람의 신념이라든가 주장이 얼마나 꺼지기 쉬운 거품 같은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결국 학생회장인 나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었다. 그 가을 10월 어느 날 나에게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도열한 가운데 전교생 앞에서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나에게 사과와 함께 운동 종료를 선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왕 멍석을 깔아준 마당이다 싶어 일의 경위와 경과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보고 형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다. 마지막엔 선생님들에게 사과 발언까지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일은 미숙한 대로 사회 정의에 대한 최초의 각성이었다.

그 후 3개월 동안 나는 죽을 듯이 공부에 열중하였고 원하던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들어갔다. 졸업식엔 고려대 학생회장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내 여고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이 일이 20년도 훨씬 더 지나서 1980년대 교수 생활 때 학생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1961년 문리대 교정이 보라빛 라일락 향기로 무르익던 찬란한 봄날, 대학 1학년 새내기가 이해하기엔 너무 벅찬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5월의 신록은 눈부신데 동요하는 대학생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문리대에 와 강연하던 김종필씨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때 열병을 앓고 난 것 같은 초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오불관언 도서관에 파묻혀 책과 씨름하며 강의실에만 들락거렸다. 그때 학생운동의 기수들은 거의 정치과생들이었다. 그들이 연설할 때면 학생들은 정치 유세를 듣듯이 몰려가서 박수를 치거나 시답지 않은 말을 하면 "우~" 하며 야유도 하였다.

1964년 어느새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되었다. 1880년대 초기개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탐색한 결과 1881년(고종 18년)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일본조사시찰단)에 대한 자료가 100책 이상 고도서실에 잠자고 있는데 아무도 손을 안 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겁도 없이 이 주제에 도전하였다. 여름방학에 겨우 논문의 틀을 짰다. 그 다음이 걱정이었는데 계엄령이 떨어졌다. 나는 아침마다 학교 정문에 가서 서성이다가 경비하는 군인의 호의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도서관의 고도서실(지금의 규장각 전신)에서 논문을 썼다. 계엄령이 시간을 벌어주어서 내 논문을 살렸으니 아이러니다. 규장각 도서와의 첫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졸업논문을 쓴 경험과 성취감은 다시 공부를 계속하게 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10여 년의 전업주부 생활 끝에 1970년대 중반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가 혹독한 정치의 계절임을 실감하지도 못할 정도로 개인적 삶의 무게가 버거웠다. 그 와중에서 석사를 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8세기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로 거슬러 올라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한 조선왕조의 본질에 다가가려?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길목에서 규장각의 고도서들이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비로소 조선왕조의 실체에 접근하였다. 그 바탕에는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로세워야 하겠다는 일념이 깔려 있었다. 전쟁사관인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평화사관인 문화사관을 구축해 가기 시작하였다.

1981년 7월 1일부로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에 전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신군부가 출범한 해였다. 이후 10여 년 민주화운동의 함성 속에 자고 깨면 최루탄 가스로 자욱한 교정에서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1984년으로 기억된다. 교정에서 경찰과 돌멩이로 싸우던 일단의 학생들이 건물로 피해 들어오자 경찰이 교실에까지 쳐들어 왔다. 인문대와 사회대의 'ㄷ'자 형으로 된 건물들을 에워싸고 아래층부터 4층 교수연구실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올라와 교수 방에 있던 학생들까지 무차별로 잡아갔다. 굴비두름 엮듯이 팔을 뒤로 비틀어 뒷사람이 앞사람을 잡도록 하여 길게 줄을 만들어 끌고 갔다.

이 일로 교수들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꼴을 보면서도 제자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강의실에 들어서니 잡혀갔던 학생들이 "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국립호텔(경찰서)에서 국비로 MT 잘하고 돌아왔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20년 전 4ㆍ19 때의 고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이후 대학 전체에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하였고 교수사회까지 동요시켜 1986년 민주화운동의 싹이 되었다. 그 해 4월 교수 서명운동에 서명한 사람은 49명에 불과하였지만 대부분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던 젊은 교수들이었다.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갈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을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탐지되는 마당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해야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실감나는 계절이었다.

내가 교수로 부임한 해에 입학했다며 내게 "우리는 대학 동기"라고 농담하는 81학번 제자가 훗날 "선생님은 한 번도 진보니 민중이니 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왜 선생님을 좋아했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휴머니즘이 우리들의 진보 논리보다 더 크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이 젖어오는 느낌이었다. 제자가 알아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최근에 그의 동기들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몇몇이 모이는 자리에 갔다. 내가 "자네들 중 말썽꾸러기들은 거의 내가 지도교수였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네" 하면서 혼자 웃었다. '말썽꾸러기'는 내 마음 속의 애칭이었음을 그들은 알 턱이 없다.

1990년대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단계에 접어들자 학생운동도 한풀 꺾이고 진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규장각에 드나들며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학문 후속 세대를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각성도 들었다. 나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후생을 키우는 일은 국가 백년대계가 아니겠나 싶어 강의에 주력하였다. 아마도 가장 결실이 많았던 시기였다.

1999년엔 규장각 관장직을 맡아 4년 동안 역임하며 평생 규장각에 진 빚을 갚을 기회도 가졌다. 규장각은 내 학문의 요람이었다. 지금도 규장각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규장각에서의 행정 경험과 노하우가 지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국사는 국어와 함께 우리 정체성의 근간이다. 언제부터인가 교과 과정에서 국사가 위축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이 세계화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자기 역사를 알아야 한다. 4ㆍ19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결국 얼빠진 한국인을 양산하는 셈이다. 제대로 된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하는 이 때, 교과를 축소한다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부심 없이 무엇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어떻게 세계화의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있겠는가?

■약력

▦1942년 강원 춘천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ㆍ박사 ▦1981~2007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999~2003년 서울대 규장각 관장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문학사상사> <조선후기 지성사> <역사 에세이>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역사에서 희망읽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등 ▦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